김정남 VX 암살, 고립 자초한 北…'고난의 행군' 임박?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왼쪽)과 그의 이복형 김정남. 김정남은 지난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신경작용제 VX 공격을 받고 숨졌다./AFPBBNews=뉴스1

1990년대 '고난의 행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북한이 김정남 암살로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김정남이 강력한 신경작용제인 VX에 독살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 수위가 날로 높아지고 있어서다. 김정남 암살이라는 무리수로 고립을 자초한 북한이 '고난의 행군' 이상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북한이 겪은 극심한 경제난을 일컫는다. 핵도발에 따른 경제제재와 자연재해가 맞물려 북한에서는 당시 수백만명이 굶어죽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라프는 26일(현지시간) 북한이 신형 탄도미사일 발사와 김정남 암살이라는 연이은 도발로 새로운 위기로 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지난 12일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강행했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은 이튿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됐다.

텔레그라프는 무엇보다 북한의 든든한 아군을 자처해온 중국의 태도가 최근 급변한 데 주목했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 18일 북한산 석탄 수입을 연말까지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유엔의 지난해 대북제재 결의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시기상 김정남 피살에 따른 보복으로 풀이된다. 김정남은 중국의 보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BACI국제무역통계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 수출입의 90%를 차지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대북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북한 외무성 당국자와 미국 전직 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다음달 1∼2일 열릴 예정이던 북·미 '1.5트랙(반민반관) 대화'가 무산된 게 그 방증이다. CNN은 2명의 소식통 말을 빌려 미국 국무부가 이 대화에 참석할 계획이던 북한 당국자의 미국 입국비자 발급 승인을 철회했다고 전했다. 말레이 정부가 김정남이 VX에 노출돼 숨졌다고 발표한 직후 이뤄진 조치라고 한다. 유엔은 VX를 대량살상무기(WMD)로 분류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밥 먹듯이' 제재를 어기는 북한보다는 북한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를 표적으로 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를 검토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영국 런던 싱크탱크인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의 아시아 프로그램 선임 연구원인 존 닐슨 라이트 박사는 "2차 제재의 잠재적 표적 가운데 하나는 중국 은행이 될 것"이라며 "중국 은행들이 자금을 지원하며 북한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입장은 더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합의한 데 대해 강력하게 반발해왔는데 북한의 잇따른 도발이 이미 중국의 사드 반발 명분과 동아시아지역 내 위상에 타격을 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이 거세지면 북한에 대한 중국의 태도 역시 더 냉담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미국의 2차 제재 위협이 이를 더 부추길 것이라는 전망이다.

김정남 암살로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관계도 급격히 냉각됐다. 말레이시아는 북한의 몇 안 되는 우방으로 북한사람이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외교·통상 등 북한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헤이젤 스미스 영국 센트럴랭커셔대 한국학 국제연구소장은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미약해 약한 회복세를 띠고 있는 북한 경제는 매우 취약한 상태"며 "중국과 말레이가 북한을 압박하면 북한이 1990년대에 경험한 위기에 돌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