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했던 바둑이 주식투자엔 '신의 한수'…증권맨 된 '미생'

서유태 교보증권 법인영업부 대리.사진제공=교보증권

'이무기'. 용(프로기사)이 되어 승천하지 못한 채 만19세 나이 제한 규정에 걸려 한국기원 연구생에서 퇴출된 이들을 일컫는 은어다. 내로라하는 실력을 지닌 100여명 연구생 중 1년에 단 6명만 프로기사가 된다. 나머지 94명은 '완생'의 길을 걷지 못한 삶, '미생'으로 남아 드라마 속 주인공 '장그래'처럼 냉혹한 현실사회와 마주한다.


서유태 교보증권 대리(아마7단)는 현실판 장그래다. 드라마 '미생' 제작전 김원석 PD를 만나 주인공을 입체감있게 구현하도록 자문을 한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그는 10세에 바둑을 시작해 초등학교 6학년때 한국기원 연구생에 입문했다. 이후 연구생 자격이 끝나는 20세(만19세)까지 프로 입단만 바라봤다. 10대를 고스란히 바둑에 바쳤지만, 최종입단에 실패하면서 돌연 사회에 내던져졌다. 초등학교 때 단절된 학업은, 사칙연산 계산순서마저 잊게 만들었다.

"10년간 바둑 외에 배운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때 새삼 깨달았습니다. 방출된 첫 해에는 아마추어 바둑대회에서 우승하고 상금도 탔죠. 아마랭킹 1위를 했지만, 어쨌든 저는 아마추어잖아요. 주변에 프로가 된 친구들을 보면 자격지심이 생기고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바둑만 바라본 치열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군대를 갔습니다."

막막했던 삶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25세, 5개월 간 머물렀던 캐나다에서다. 대학 교수님 추천으로 캐나다에서 바둑 솔루션 프로그램 자문을 맡으면서 실전영어를 배웠다.


"처음 한마디도 못했는데 공부를 했더니 3개월째부터 생활영어가 되더라구요. 공부가 할만하구나 싶었죠. 당시 30대인데 새롭게 유학오는 분들도 있었어요. 나는 20대인데 도전 못할게 뭐있나 싶어서 복학 후 금융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와 함께 연구생 시절을 보냈던 지인이 증권사에 입사했다. 서 대리는 그의 조언에 따라 하루 14시간씩 공부해 토익 900점 이상, 금융권 자격증 5개를 취득하는데 성공했다.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바둑을 한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기보다 엉덩이가 무거워서 몇시간씩 앉아있을 수 있거든요. 공부할때 그게 제일 요긴했던 것 같아요.(웃음)"

이제 서 대리는 증권맨으로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는 "바둑은 다음 한 수를 두기까지 형세를 파악하고 상대방의 다음 수를 예측하는 등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 "주식시장이나 법인영업도 주요 참가자들의 심리와 형세를 파악해 공수를 선택한다는 점이 비슷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낯선 점도 있다. 바둑이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인 것과 달리, 법인영업은 함께 관계를 쌓아나가야 하는 탓이다. 그는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게 쉽진 않지만 내 노력에 따라 기회가 열리는 것이 즐겁다"며 "바둑 좋아하는 고객을 만나면 100전100승"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드라마 '미생'은 그에게도 인생 드라마다. 특히 "기회에도 자격이 있다. 이 빌딩 로비를 밟으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오갔는지 알아야 한다"는 명대사가 재기할 힘을 줬다. 서 대리는 "10년간 바둑만 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학벌이나 경험치 등이 차이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힘들지만 몇배 더 노력해서 차이를 극복하고 성공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의 완생을 위한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