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모든 것 만든다"…가죽공예 빠진 삼성맨

권순환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 파워소자개발팀 사원/사진제공=삼성전자<br>

"가죽 재단 작업이 끝났다면 이제 '보강' 작업에 들어갈 차례다. 보강이란 가죽이 늘어지는 현상을 방지하고 형태가 유지되도록 하는 작업인데 이번 작업에선 보강재 레드보드(Leather Board), 스펀지를 썼다."


전문 가죽공예 종사자의 말이 아니다. 2013년 1월 삼성전자에 입사해 시스템LSI 사업부 파워소자개발팀에서 연구개발직에 근무하는 5년차 직장인 권순환 사원(30)의 설명이다.

3년 전인 2014년 초 우연한 기회에 접한 가죽공예는 권 사원의 '인생취미'가 됐다.

권 사원은 "입사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다른 직장인들처럼 취미에 관심이 생겼다"며 "캘리그래피, 비누공예, 목공 등을 경험해 봤지만 가죽공예는 가죽 특유의 촉감과 느낌, 향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가죽공예는 비교적 진입 장벽이 높은 취미다. 가죽은 물론이고 바늘, 가죽을 고정시키는 포니, 가죽에 구멍을 뚫는 그리프, 망치 등 기본적인 사용도구 마련에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


특히 매 작업에 쓰이는 가죽은 재료의 종류에 따라 '마리'(판매 단위)당 수 만~수 십 만원을 호가한다.

예를 들어 '코도반'이라 불리는 말 엉덩이 부분 가죽은 전세계에서 극소량 생산되는데 손바닥만한 크기에 50만원 수준. 권 사원은 "지금까지 가죽공예에 들어간 비용만 따져봐도 국산 중형차 한 대 값은 나올 것"이라며 "구매한 소가죽은 20마리 정도 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죽공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기분 때문. 권 사원은 "제품 하나를 만들 때마다 성취감이 남다르다"며 "특히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작은 소품에 그 사람의 이름을 새겨 선물하면 인상이 각인되기 때문에 뿌듯함도 느낀다"고 말했다.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 가죽공예를 하며 익힌 고도의 집중력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눈썰미는 초미세를 다투는 반도체 업무와도 연관성이 많다는 것. 첫 디자인대로 제품이 나오거나 실수를 한 번에 찾아낼 때의 쾌감도 가죽공예와 반도체 설계의 서로 닮은 점이다.

권 사원이 지금까지 만든 공예품은 지갑이나 서류가방, 핸드백은 물론 마우스패드, 시곗줄, 명함꽂이, 카메라 케이스 등 200~300점에 달한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가죽으로 만들 수 있다는 설명. 처음에는 가방 하나를 만드는 데 3개월도 걸렸지만 이제는 하루에서 사흘이면 완성된다.

수준급 솜씨에 지인들로부터 제작신청도 종종 들어온다. 자리에 한 번 앉으면 8시간은 꼬박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주말이나 연휴에 시간을 할애한다. 백화점에 가면 남성 가방보다 디자인이나 기법이 다양한 여성 핸드백에 더 눈길이 갈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한다.

회사 내에도 권 사원의 이색취미가 입소문을 타면서 지난해 말부터는 사내 블로그에 칼럼 게재를 시작했다. 동료들은 그를 '크래프트(Craft) 권' '금(金)손'이라 부른다.

권 사원은 "가죽공예를 하다보니 여성들 가방이 왜 비싼지, 왜 그런 가방을 아끼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며 "재료비도 재료비지만 제작에 들이는 비용과 수고를 생각하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수공예 가방을 선뜻 선물로 남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가죽공예의 취미를 잘 살려 앞으로 책을 내고 싶다는 게 권 사원의 꿈. 그는 "취미이지만 프로보다 더 프로답게 잘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며 "시간이 지난 후에 가죽공예를 하면서 직장인으로서 느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