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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카트리나… 필요할 때 와주는 사람들

-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입력 : 2005.09.07 08:30|조회 : 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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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이사를 했습니다. 아파트 옆 동으로 옮기는 것이어서 가볍게 생각했지만, 짐싸고 내리고 올리고 푸는건 서울에서 부산가는 거나 20미터 떨어진 옆 동으로 가는거나 똑같았습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선후배 친척 이삿짐 품앗이가 일상이었지만 요즘 어디가서 이사가는거 도와달라고 하면 '환자'취급 당할 터라 당연히 '포장이사'를 택했습니다.

30대 후반~40대 후반의 남자3, 여자1명으로 구성된 전문가들의 이삿짐 부리는 솜씨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침대 에어컨 냉장고 이런 어지간한(?) 가구는 혼자 번쩍 들어서 차위에 싣고 내리고, 온갖 잡동사니들도 규격화된 박스에 담아 순식간에 옮겼습니다. 가구는 물론이고 책꽂이의 책까지 정확히 기록했다가 제자리로 옮겨놓고, 커튼이며 TV까지 이전 상태로 복원해놓는데...'프로'라는 말은 이럴때 쓰는구나 싶더군요.

하루종일 중노동의 대가로는 1인당 10만원이 안되는 이삿짐 삯이 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 한번 하려면 "점심대접이 소홀하다" "이렇게 힘들게 일했는데 팁도 없느냐"는 온갖 투정으로 맘이 상해 '이삿날=싸움날'이 됐던 기억에 내심 불안했는데, 이 분들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일을 마쳤습니다.

자주 해보신 분들은 이사라는게 짐만 나르면 되는게 아니라는걸 아실겁니다.
(실은 저도 지금까진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때 새 집으로 퇴근하는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결혼 후 다섯번째인 이번 이사에서는 일을 조금 거들면서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우체국 은행 보험 카드사 아이들 학교 등등 온갖 주소 변경하는것부터 시작해 전화 가스 인터넷 에어컨 선반설치 하다 못해 세탁기바닥 수평 맞추는 것까지... 혼자 이걸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무인도에 막 내던져진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혼자서는 불하나 피울수 없는 현대인의 절망감을 절감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저와 제 식구들은 새로 옮겨간 집에서 편안하게 이부자리를 깔고 잘 수 있었습니다.

이사가 시작되기 직전, 동네 인테리어 업체에서 짐을 얹어놓을수 있는 선반을 이사갈 집 베란다와 부엌에 튼튼하게 달아주었고, 이삿짐이 옮겨지는 한편에서는 도시가스가 연결됐습니다. 이사가 끝나갈 즈음엔 전화 수화기도 경쾌한 '따르릉' 소리를 되찾았습니다.

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통신회사 직원은 PC가 제자리를 찾기 기다렸다가 인터넷을 연결해줬을 뿐 아니라 '요즘 컴퓨터가 느려졌다'는 한마디에 덤으로 무료 백신프로그램까지 설치, PC를 청소해줬습니다.

밥 지을 정신조차 없는 이삿날 저녁, 주린배를 채울수 있게 전화건지 15분만에 총알같이 달려온 자장면집 총각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한 집 이사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줬습니다.

물론, 이게 다 따지고 보면 돈이 들어간 '구매' 행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같은 돈을 내더라도 내가 필요한 시간에 정확하게, 숙련되고 믿을수 있는 솜씨로, 힘들어도 얼굴 찡그리지 않고 친절하게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자, '문명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행운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TV를 통해 접하는 참혹한 장면들은 '문명화된 사회'에 산다는 것의 고마움을 더욱더 느끼게 해줍니다. 물에 잠긴 뉴올리언스와 일주일이 넘도록 그 곳을 둥둥 떠다니는 시신들입니다.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가슴을 때립니다.
연방 공무원인 아들은 휴대폰으로 언제 구하러 올지를 묻는 노모에게 "화요일에 갑니다" "수요일엔 갈겁니다" "누군가 곧 갈겁니다" 라고 헛된 약속만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닷새째인 금요일 노모를 물살에 떠내려 보내고야 말았습니다. 구호를 위해 식량 의약품과 장비를 들어야 할 구호대원, 군경 병력들이 약탈과 폭력에 맞서기 위해 중무장한채 거리를 순찰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내가 필요할때 누군가 와줄수 있는 사회, 이는 문명화된 사회의 또 하나의 척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라크, 빈 라덴 등 주적과 자신들을 대비시키기 위해 대통령이 'Civilized Society'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세계 최고 부자나라 국민들이 이런 참혹한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본 분들은 겉으로 드러난 미소 뒤에 넘어설수 없는 장벽이 인종간 빈부간에 가로 놓여있는 '샐러드 바'라는 표현을 자주 입에 올립니다. 흑인 노예와 소수 인종에 대한 가학과 차별이라는 역사적인 취약점을 지닌 미국사회. 그 사회가 내부 약자에 대한 배려나 화합보다는 약육강식의 효율성과, 외부의 적에 대한 적개심을 강조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뻗어나가던 미세한 균열이 허리케인 카트리나 앞에 한꺼번에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상호신뢰가 작동하지 않을때, 어떤 아비규환이 나타나는지 무서운 경고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남의 나라 불행을 조롱하자는게 아닙니다. 이사를 무사히 마친 안도감에, 오지 않는 손길을 기다리며 절망에 빠져 있거나 목숨마저 잃은 사람들의 비참함이 더욱 대비돼 적어보는 겁니다.

내가 필요할 때, 질높은 서비스를 기분좋게 '구매'할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순간은 이 땅에 산다는게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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