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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대통령' 시대로…이명박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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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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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1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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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 출신 첫 대통령...'도전'과 '신화'로 대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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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대 대통령 당선자 이명박.
'군인'에서 '직업정치인' 시대, '인권변호사'를 거쳐 다시 'CEO' 대통령 시대로.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5년간 대한민국호(號)의 대항해를 이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랜 기간 재계에 몸담았던 기업인이 국가 수반에 오른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史)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당선자의 '이력'은 전직 대통령들과는 사뭇 다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라면 민주화를 이끈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업정치인이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 출신이다.

반면, 이 당선자는 현대그룹의 신화를 썼던 '성공한 기업인'이다. 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도 '경제 대통령'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따라 이 당선자가 군부 정권, 민주화 정권을 잇는 'CEO 대통령' 시대를 열어 제친 셈이다.

◇'굴껍데기'처럼 들러붙은 가난= 이 당선자는 지금으로부터 꼭 66년 전인 1941년 12월1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곤궁한 목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이충우씨(1981년 작고)와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3녀 중 다섯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명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체험한 유년 시절은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 학창시절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 학창시절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전쟁으로 누나와 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을 겪어야 했다. 7명의 식구가 단칸방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하루 두끼를 '술지게미'로 떼워야 할 정도의 빈한한 삶이었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고향인 포항 재래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좌판을 열고 '꼬마 상인'으로 행세했다.

김밥과 풀빵을 만들었고 아이스크림에 뻥튀기 장사를 했다. 과일, 생선도 팔았다. 상거래 기술을 남들보다 먼저 익힌 셈이지만 이 당선자는 "굴껍데기처럼 들러붙은 가난이 떨어질 줄 모르던 시기였다"며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가난으로 고교 진학이 언감생심이던 그 때, 이 당선자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동지상고(야간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고교 3년 내내 수석은 이 당선자의 몫이었다. 동지상고 재학시절 뻥튀기 장사를 하던 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여고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 이 당선자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장사를 했다. 이를 본 어머니가 "네가 구걸을 하는 것도, 남을 속이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부끄러우냐. 당당하게 살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당선자는 지금도 "어머니의 소중한 가르침을 이제껏 잊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하곤 한다.

◇대학합격, '첫 신화' 쓴 학창시절= 1959년 12월 고교 졸업 후에는 다시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일을 해야 했다. 가족들과 함께 둥지를 튼 곳도 고단한 삶으로 점철된 이태원 '판자촌'.

매일 새벽이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당 노동자 신분이었다. 그러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대학시험이라도 한 번 쳐보자"며 도전장을 던졌다.

교재가 없어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준 책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느라 함께 생활하던 노동자들로부터 "불 좀 끄라"는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

'주경야독' 끝에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지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시골 촌뜨기 일당 노동자가 이뤄낸 첫 '작은 신화'였다.

▲'6.3 시위' 주동 혐의로 재판받는 모습.
▲'6.3 시위' 주동 혐의로 재판받는 모습.
대학 재학 시절에도 일하는 '고학생'이었다.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환경미화원 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이 당선자는 후에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자 월급 전액을 환경미화원 자녀들을 위해 기부했다.

이 당선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환경미화원 시절 어두컴컴한 새벽에 일을 하다보면 차에 치여 다치거나 부상을 입는 분들이 많았다. 다치면 그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했다. 그래서 내 월급을 환경미화원 자제들에게 기부한 것이다".

이 당선자가 사회 의식에 눈을 뜬 것도 이 무렵이다. 상과대 학생회장을 맡아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다.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는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을 복역했다. 운동권 학생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져 취업이 제한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운명적 만남' 정주영과의 조우= 이 당선자는 자신의 삶을 바꾼 '사건' 중 하나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만남을 꼽는다. 그의 말을 빌자면, "정주영이 없었다면 이명박도 없었"다.

이 당선자는 대학 졸업 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국가가 국영기업체 취업이나 해외 유학으로 꼬드겨 운동권 학생들의 '사상전환'을 꾀하던 시기였다.

취업이 제한됐던 이 당선자는 "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 전 대통령에게 보냈다. 새파란 젊은이가 청와대와 담판을 시도한 셈이다.

▲1981년 현대그룹 사원 하계수련회에서 고(故)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1981년 현대그룹 사원 하계수련회에서 고(故)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결국 이 당선자는 1965년 정 전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현대건설은 당시 직원 98명의 중소기업이었다. 면접에서 이 당선자는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 라고 물은 정 전 명예회장의 질문에 "건설은 창조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당선자는 지난 7월 한나라당 검증청문회에서는 "신입사원 연수회 당시 정 전 명예회장이 '술을 먹자, 낙후되면 물러서라'고 해 내일 당장 쓰러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끝까지 버텼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이 당선자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정 전 명예회장의 신임을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입사 2년 만에 대리, 29세 이사, 입사 12년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에 사장에 오르는 등 '샐러리맨 신화'를 써 나갔다.

태국 건설현장에서 성난 인부들로부터 금고를 지켰던 일, 밤새 불도저를 해체한 뒤 조립하며 구조를 익힌 일, 현대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맞섰던 일 등이 당시의 대표적 일화들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 중국 장쩌민 전 주석, 옛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 '연'을 튼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당선자는 마침내 46살에 회장이 된다.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인천제철 등 현대 계열사 10여곳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하지만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 이 시기 자녀 교육 위장전입으로 이 당선자는 대선 기간 내내 경쟁 후보들의 '맹공'
을 받아야 했다. 실소유 의혹을 받았던 문제의 도곡동땅을 처남과 친형이 사고 판 것도 이 즈음이다.

◇'청계천' 신화로 '청와대 CEO'로= 이 당선자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2년이다. 27년간의 현대그룹 생활을 끝내고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다.

그 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주영 회장과도 결별하게 된다. 1995년에는 서울시장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 나섰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하는 쓰라림을 맛봤다.

그러나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서 출마,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사사건건 부딪쳐 온 청와대의 현재 주인과 새 주인의 첫 격돌이었다.

이 당선자는 그러나 같은 해 9월 비서관이었던 김유찬씨가 선거비용 초과 지출 사실을 폭로하면서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게 된다. 결국 1998년 의원직을 사퇴해야 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한나라당 경선에서 김유찬씨와 박근혜 전 대표측 법률특보를 지낸 정인봉씨가 '검증'의 도화선을 당긴 것도 바로 이 사건이었다.

1년여를 미국에서 머물던 이 당선자는 1999년 말 귀국,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사이버금융' 사업에 손을 댔다. 2000년 LKe뱅크, e뱅크증권중개 등을 설립했다. 대선전 내내 이 당선자를 괴롭힌 BBK 전 대표 김경준씨의 악연이 시작된 것도 이때쯤이다.

이후 이 당선자는 다시 사업을 접고 2002년 7월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복귀한다. 기업 경영기법을 시정에 도입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이 당선자는 재임 기간 중에 청계천 복원사업, 서울시 대중교통체계 개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06년 7월 퇴임 후 곧바로 대선 출마를 선언 근 1년여를 지지율 1위로 '독주'한 끝에 과반이 넘는 득표로 제 17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청계천 공사 현장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서울시장 재임 시절 청계천 공사 현장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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