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떠도는 해외드라마 숨은 번역가들...알고보니

“미드, 일드 보느라 밤 샜어.” 휴일이면, 대학생을 불문하고 20~30대들이 자주 하는 소리다. 어느 순간부터 미국, 일본 등에서 상영되고 있는 드라마를 국내 P2P사이트에서 쉽게 다운받아 볼 수 있게 됐다. 심지어 온라인에서 먼저 입소문을 탄 검증된 해외드라마는 이후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판권을 구매해 정식 방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터넷에서 떠도는 해외드라마 자막은 누가, 왜 만들까. 곳곳에 숨어있는 자막번역 ‘능력자’들을 수소문 끝에 찾았다. 지금은 KBS미디어에서 정식 발매하는 BBC드라마 <닥터 후> DVD의 번역가로 참여하게 된 대학생 번역가 하희정 씨(서울대 영문학4)와 김현영 씨(전남대 산업공학2)를 만나보았다.

◇좋아서 시작한 일…재능기부

“트렌드에 가장 민감하고 발 빠른 학생층이 드라마 자막번역의 주축이에요.” (김현영) 영어드라마의 자막을 만드는 이들은 의외로 친근하고 평범한 대학생들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고등학생, 대학 신입생일 때 열정 하나로 자막번역이라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TV에서 우연히 본 <닥터 후>가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온라인으로도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부터 한글자막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만들어 볼까?’ 생각했죠.” (하희정)

▲김현정 씨

두 사람 모두 드라마에 대한 애정으로 번역을 시작했지만, 실제로 그 제작과정을 들어보면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누리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한글자막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번역가들은 해당 프로그램이 본국에서 방영이 끝나는 시점부터 손이 바빠진다. “드라마가 끝나면, 보통 2시간 이내에 청각장애인용 대본이 홈페이지에 업로드 돼요. 그러면 그 때부터 10시간 정도 쉬지 않고 달려요(번역을 해요).” (김현영)


하씨는 더 좋은 번역을 위해 드라마 한회를 작업할 때 20번 이상 반복해서 본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자막 없이 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2~3번 더 본다. 그 뒤에 영어자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고 이야기의 맥을 확실히 잡은 후에 본격적인 번역에 돌입한다. 과연 영문학도다운 꼼꼼한 자세였다. 이과 출신인 김씨는 “<아인슈타인과 에딩턴>같은 과학을 다룬 작품을 번역할 때는 더 즐거웠다”고 전했다. “번역이 완료되면 좋은 작품은 담당 교수님께도 추천하고 공유하기도 한다. 그렇게 고된 작업 끝에 누리꾼들의 감사의 피드백을 받을 때는 성취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이 재능기부를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취미생활 넘어 번역은 번역

아무리 좋아하는 드라마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쳤어도 번역과정에는 여러 고충도 뒤따른다. 비단 누리꾼의 재촉과 시간과의 싸움만은 아니다. 두 사람은 초를 다투는 그 시간에도 좀 더 좋은, 좀 더 정확한 번역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 예를 들어 영어로는 의미가 이해되지만 적당한 한국어 표현을 찾기 어려울 때, 그 반대로 직역해도 한국어로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을 때가 그렇다.

▲하희정 씨

하씨는 현재 번역중인 <닥터후>에서 그 사례를 찾는다. “rub it in이라는 말이 나와요. 단순하게 직역하면 ‘문질러서 그것을 넣다’인데 도저히 영상하고 그 해석은 맞지 않는 거예요. 실제 의미를 알고 보니 ‘보기 싫은 것을 눈앞에 들이밀다’는 관용어였어요. 그런 건 알아내기가 쉽지 않죠.” 하씨는 스마트폰에 있는 사전 애플리케이션을 보여준다. 국어사전과 영한사전, 그리고 두 가지 종류의 영영사전이 차례로 늘어서있다. 그리고 이 사전들과 친해지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영어번역을 하면서 오히려 한국어 사용에 더 신중해졌다고 설명한다. “자막의 싱크를 맞추기 위해서 몇 번이고 영어문장을 반복청취하다 보니 듣기 실력이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데 오히려 한글로 자막을 써야할 때 우리말인데도 더 어려움을 느껴요. 나 혼자 보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정확한 단어를 선택해야 하고 맞춤법, 띄어쓰기도 철저히 지키게 됐어요.” 요즘 김씨는 ‘더 귀에 착 달라붙는 한국어 표현’을 찾기가 지상과제라고 말한다. 또한 주로 영국드라마를 번역하다보니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공부도 시작하게 됐다.

두 사람은 자막번역이란 끝없는 공부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모르는 것은 반드시 찾아내 몸에 체득되도록 하고, 정확한 검증 없이 적당히 의미만 통하게 하고 넘어가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하씨는 “귀찮을 땐 대강 넘어갈까 하는 유혹도 들어요. 하지만 알고 있는 것도 다시 찾아보자는 각오를 다져야 해요. 오만하게 행동하는 순간 정말 쉬운 단어도 틀릴 수 있거든요. 결국 나의 자아를 이기는 일 같아요”라고 전했다.

◇전문 번역가로 거듭나

어느새 두 사람은 9월 중순 정식 DVD로 발매되는 <닥터 후> 시즌 3의 번역가로 참여하게 됐다. 5년 전 좋아서 시작한 일이 이제는 떳떳한 커리어가 된 것이다. 하씨는 번역에 관련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줬다. “공중파에서 하는 <닥터 후>를 보면서 제가 과거에 했던 번역을 대조해보는 것도 좋은 공부였어요. 그런데 하루는 방송에서 보이는 오역을 찾아 블로그에 글을 썼어요. 농담으로 ‘차라리 나를 번역가로 써 달라’는 추신까지 달아서요. 그랬더니 다음 주 방영분에는 그게 반영돼서 방송되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번역팀에서 일하게 됐어요.”

10년 뒤의 자기 모습을 그려달라는 질문에 하씨는 두가지 대답을 내 놓았다. 졸업 전에 TCT(번역능력인증시험)를 보고 영상전문번역가로 활동하는 것과, 또 하나는 <해리포터> 같은 해외의 좋은 콘텐츠를 발굴해 한국에 소개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실력이 쌓이게 되면 한국의 콘텐츠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에 소개하는 일도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키팅이라고 불리며 지난 달 작고하신 신광현 교수님의 영향으로 최근 관심을 갖게 된 분야다.

더 전문전인 번역공부의 욕심은 김씨에게도 있다. “기회가 닿으면 번역대학원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고 나중에는 영상번역과 출판번역을 겸하고 싶다.” 특히 출판번역에 대한 김씨의 시각은 남다르다. “대부분 원서인 전공서적을 번역해 학생들이 훨씬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획일화된 영어시험의 고득점과는 다른, 좋아서 몰두한 일이 나만의 스펙이 되어 훨씬 자랑스럽다고 하는 두 사람의 행보가 기대된다.

조아정 객원기자/[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