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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기다린 120년, 욕망은 죽지 않았다

[이언주 기자의 공연 박스오피스]연극 '헤다 가블러'···13년만에 무대, 이혜영 열연 빛나

이언주의 공연 박스오피스 머니투데이 이언주 기자 |입력 : 2012.05.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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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다 가블러', 신혼여행 사진을 함께 보고 있는 헤다와 뢰브보르그 ⓒ명동예술극장
↑연극 '헤다 가블러', 신혼여행 사진을 함께 보고 있는 헤다와 뢰브보르그 ⓒ명동예술극장

뢰브보르그 : 대답해, 지금. 내 사랑 헤다. 왜 그렇게 떠났지?
헤다 가블러 : 다시 한 번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난 입을 닫아버릴 거야.
뢰브보르그 : 우리 둘만 있는데도?
헤다 가블러 : 안 돼. 생각은 자유, 발설은 금지!



헤다의 옛 연인 뢰브보르그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다그치자 헤다는 칼날처럼 차갑고 뾰족한 말투로 말한다. "생각은 자유, 발설은 금지!" 매우 연극적이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무대를 감쌌다. '헤다' 역으로 13년 만에 연극무대로 돌아온 배우 이혜영이다.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의 '헤다 가블러'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1891년 국내 초연 이후 120여년 만이다. 본격적인 프로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기획 단계부터 공연계의 관심을 받았다. 이 작품이 자주 공연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미란 명동예술극장 공연기획팀 과장은 "전 세계적으로 여주인공 '헤다' 역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작품의 색깔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에, 잘 어울리는 배우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며 "최 상류계층인 헤다의 귀족스러운 집을 꾸미는 무대세트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설명했다.

극장 측은 올해의 첫 신작공연으로 이 작품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주인공으로 배우 이혜영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혜영이 아니면 작품을 아예 올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역시 탁월한 캐스팅으로 120년 만에 헤다는 국내 무대에서 빛났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최고의 부와 명예를 가진 노르웨이 가블러 장군의 딸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헤다가 6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튿날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헤다는 남편의 성인 '테스만'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성인 '가블러'를 붙인 채 살아간다. 입센은 결혼을 하면서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르는 유럽의 전통을 거부하는 여자 인물을 창조해 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녀에게 결혼한 여자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현실을 제공한다. 그 현실을 헤다의 일상과 다른 인물들의 욕망, 그와는 대립되는 헤다의 자존감을 통해 그녀의 비극을 절절하게 그려냈다.

↑연극 '헤다 가블러', 헤다를 유혹하는 브라크 판사 ⓒ명동예술극장
↑연극 '헤다 가블러', 헤다를 유혹하는 브라크 판사 ⓒ명동예술극장
헤다는 신혼여행지에서조차 도서관에 박혀 논문에 필요한 자료 수집에 몰두하는 고지식한 학자인 남편 테스만을 보며 지루함과 따분함을 느낀다. 호시탐탐 자신을 유혹하려드는 브라크 판사와 남편의 친구이자 옛 연인인 뢰브보르그의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을 느끼며 자신의 욕망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하고 떨쳐버리기도 한다. 특유의 자존감과 오만함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지배하려 하지만 결국은 죽음을 택하고 만다.

이번 작품은 무대와 의상, 조명과 음향에도 인간 내면의 욕망과 등장인물 각각의 색깔이 잘 드러났다. 19세기 당시 의상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헤다는 각지고 딱딱한 옷을 입고 등장할 줄 알았지만 예상을 깼다. 오히려 순백의 여성스러운 소재를 사용해 그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부드러움과 자유로운 영혼을 반영했다.

또 와인 따르는 소리, 나무 타는 소리, 총 소리가 무대 위에서 더욱 도드라질 수 있도록 음향효과를 극대화 했고, 이와 잘 어우러진 음악도 공연의 깊이와 완성도를 높였다. 다만 극중 몇 차례 배우들의 코믹한 대사와 몸짓은 극의 양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작품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했던 욕심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말 못하는 꼽추 하녀 베르타 역을 맡은 신인 배우 임성미의 차분하고 무게감 있는 수화연기는 잔향이 오래 남는다.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02)727-0929

△연출 박정희 △무대 여신동 △의상 김지연 △조명 김창기 △작곡·음악감독 박천휘 △분장 이동민 △소품 강민숙 △조연출 정수진·이지영 △출연 이혜영, 김수현, 강애심, 김성미, 호 산, 김정호, 임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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