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과와 철학과를 합친다고? 속사정 살펴보니…

서경대학교 국문학과, 철학과 재학생들이 학과 통합에 반대하며 학교 건물에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머니투데이 양정민 기자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서경대 국어국문학과와 철학과를 통합한 답니다. 학생들 몰래 추진했습니다. 학문의 기본인 과목들이라 더 답답합니다. 학문의 근본을 없애는 일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자신을 서경대 국문과 재학생이라고 밝힌 한 트위터 이용자(@Korean_1009)는 지난 2일부터 트위터에 위와 같은 글을 남기며 모교의 학과 통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알려 왔다.


김용민씨는 지난 2일 자신의 트위터(@funronga)에 이 학생의 글을 리트윗(재전송)하며 "철학과는 취업률 높나요. 거기도 위험합니다"라는 의견을 남겼다. 이어 김씨는 "문사철(문학, 역사학, 철학) 싫어하는 것. 낡고 부패한 기득권자의 특징이지요. 배금과 토건을 막을 힘은 인문학적 성찰 뿐입니다"라며 학과 통폐합에 반대 입장을 표했다. 방송인 김미화씨도 3일 자신의 트위터(@kimmiwha)에 이 학생의 글을 인용해, 하루만에 100회 이상의 리트윗을 기록했다.

◆ 서경대 재학생 "국문+철학? 코끼리 코에 황소 뿔 단 격"

11일 오후 서경대 학과통합과 관련된 설명회 자리에서 인문대 학장 안병팔 교수(오른쪽)가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머니투데이 양정민 기자

실제로 서경대학교는 철학과와 국문과를 통합해 문화콘텐츠학과(가칭)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소식이 전해지자 서경대 국문과, 철학과 학생회는 총회를 열어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경영학부로 통합이 추진되고 있는 금융경제학과 학생회도 학교 곳곳에 반대 대자보를 붙였다.


지난 11일, 서경대 관계자들과 재학생 간의 토론회 자리에는 100명이 넘는 학생이 모였다. 좌석이 부족해 일부 학생들은 선 채로 토론회를 지켜보기도 했다.

토론회 자리에서 인문대 안병팔 학장은 “전통적 인문학이 위기를 맞는 한편, 문화콘텐츠 분야에서는 한류열풍으로 인력 수요가 늘고 있다. 문화산업의 요구에 맞게 커리큘럼을 만들어 여러분을 잘 훈련시켜서 내보내면 여러분을 당해 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국문과와 철학과를 통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로 취업률이 크게 오른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는 일부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토론회에서 발언한 학생 중 대다수는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국어국문학과 재학생 신모씨는 “대학 측은 철학과 국문학의 장점을 모으면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코끼리 코와 황소 뿔을 모으면 경쟁력이 키워지나. 이것이 인문학인가”라고 꼬집었다.

공공인적자원학부에 재학 중이라고 밝힌 한 남학생이 "서경대 건학이념은 학생을 취업시키는 것이 아니다. 대학은 교육기관이지 직업소개소가 아니다"라고 발언하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통합 추진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이 충분히 수렴되지 못했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금융경제학과 재학생 최모씨는 “토론회 전까지 학교 측으로부터 학과 통합에 대한 공지를 받지 못했다. 통합은 기정사실화된 것이고 이제야 통보하는 방식으로 설명회를 연 것이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과학대 김영호 학장은 이에 “논의 시작부터 (논의과정이) 오픈되면 (통합에 관해)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는다. 내가 학장으로서 총학생회에 얘기했어야 했는데 일이 바빠서 학생처장이 먼저 (학생들에게) 얘기하게 됐다. 그런 부분은 사과를 드린다”고 해명했다.

◆ 취업률 낮은 대학은 정부 재정 지원, 학자금 대출 '빨간불'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2월23일 보도자료를 통해 밝힌 '2013학년도 학자금대출제한 대학 평가지표'

서경대가 학과 통합을 추진하는 속사정은 따로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2004년 발표한 ‘대학 구조개혁 방안’의 일환으로 취업률을 정부 재정지원과 연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9가지 평가지표(4년제 대학 기준)에서 하위 15%에 속한 대학은 재정지원이 제한된다.

하위 15% 대학 중 4개 절대평가지표(취업률, 재학생 충원율, 전임교원 확보율, 교육비 환원율)에서 2개 이상 '미달' 평가를 받은 대학은 재학생의 학자금 대출 한도에도 제한을 받는다.

교과부가 9가지 평가지표 중 취업률은 재학생 충원율(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0%)을 차지한있다. 이는 장학금 지급률(10%)이나 등록금 부담완화(10%)보다 훨씬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과부가 오는 2013학년도부터 취업률 절대평가 기준을 45%에서 51%로 올리기로 밝힘에 따라 취업률이 낮은 학과가 ‘정리 대상’에 오를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서경대 기획처장 김준 교수도 토론회 자리에서 학생들을 향해 “대학이 부실대학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서는 취업률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며 “절대평가지표(취업률 51%)가 달성돼야 하는데 졸업한 여러분의 선배들 취업률이 그 정도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해 9월5일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한 대학구조개혁 개념도

이같은 학과 통폐합 사례는 서경대가 처음이 아니다. 동국대는 오는 2013학년도부터 문예창작학과는 국어국문학과와, 물리학과는 반도체학과와 통합시킬 예정이다. 윤리문화학과는 2013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뽑지 않는다. 이에 반발해 8일간 총장실 점거농성을 벌인 동국대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중앙대는 지난 2010년 영어를 제외한 외국어 관련학과를 아시아문화학부와 유럽문화학부로 통합했다. 가정교육과는 올해부터 신입생을 뽑지 않는다. 지난 2010년 학과 구조조정 당시 중앙대 재학생 2명은 10여m 높이의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 반대 시위를 벌였다. 독문과 재학생 노영수씨는 학내 공사장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이다 퇴학처분을 받았다. 노씨는 1년여의 법정싸움 끝에 지난해 1월, 퇴학처분 무효 판결을 받아 복학했다.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는 "저출산으로 인해 학령인구가 줄면서 문을 닫는 대학이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교과부는 다양한 지표를 종합해 대학을 평가하고 그에 따른 제한을 가함으로써 경쟁력이 낮은 대학에게 미리 신호를 주는 것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해서 경쟁력을 높일지는 각 대학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박거용 한국대학교육연구소장(상명대 교수)은 이에 대해 "개별 대학 입장에서는 교과부 평가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취업률이 낮은 학과 정원을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박 소장은 "많은 대학이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경희대는 지난해부터 '후마니타스 칼리지(Humanitas College·교양대학)'를 신설해 오히려 인문학 교육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인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소양을 갖춘 인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도록 대학이 발상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