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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꿈도 늙는다

[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머니투데이 김준형 산업1부장 |입력 : 2012.06.01 15:06|조회 : 8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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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도 실패했고, 어차피 얼마 못 삽니다. 그냥 깨끗이 정리하시죠"
"..."
장의사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장례식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관이 준비돼 있다.
오른쪽 옆구리에 난 기다란 수술자국을 내려다봤다. '하긴 며칠 더 살자고 발버둥치며 나와 가족들에게 말기암의 고통을 연장해본 들 뭐 하겠나'
주위에 서 있는 가족들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고 관 속에 들어가 누웠다.
딱딱하고 차가운 널판지 감촉이 섬찟하다고 느낀 순간, 관 뚜껑이 내려와 코앞에서 멈춘다.
쾅, 못이 하나 박히는 소리...'아냐 쿨한 척 할 때가 아냐. 진짜 마지막 순간인데'
"안돼~. 단 며칠만이라도 마무리할 거 하고 갈래. 볼 사람,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

그렇게 꿈을 깼다. 한 재계 인사의 상가를 다녀온 날이었다. 그래 이런 게 개꿈이지. 대학입시 혹은 대학 기말고사에 백지 내면서 비참해하는 꿈. 다시 군복입고 뺑뺑이 치면서 '나 제대했는데...'라고 절규하는 꿈, 다른 여자 집적거리다가 '아 나 결혼했지'라고 입맛 다시는 꿈, 취재현장에서 물 먹고(낙종하고) 비참해지는 꿈...
'입시, 군대, 결혼, 직장' 대한민국 남자들의 4대 개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죽는 꿈까지 '5대 개꿈'을 꾸게 됐다. 개꿈도 늙는다.

'데드라인(Dead line)'에 쫓기며 살아온 직업이지만 진짜 데드라인을 통보받게 된다면 그 느낌은 개꿈의 찜찜함과는 비교도 안될 것이다.
"앞으로 석달밖에 못 삽니다"
미국 최대 회계법인 KPMG의 최고경영자(CEO) 유진 오켈리는 2005년 이 말을 듣게 된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을 고객으로 둔 세계 최고 기업을 일구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던 53세의 '젊은' CEO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선고였다.
절망과 충격의 순간들을 넘기고, 그는 암 진단을 '축복'으로 규정했다. "어떤 이는 죽음에 대한 대비 없이 이른 나이에 갑자기 사고 등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또 어떤 이들은 죽음이 가까워 올 때는 이미 심신이 쇠약해져 생의 마지막 날들을 의미 있게 보내지 못한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게 됐으니 축복이라는 것이다.

오켈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100일을 소중한 기회로 삼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특별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전화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암 치료 재단에 기부하는 등 재산도 정리했다. 추도사를 읽을 사람과 관을 운구할 사람을 구하는 등 장례식 계획도 꼼꼼하게 마련했다. 발작이 심해지고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그는 연명치료 대신
식사를 중단하고 긴 여행에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을 오켈리는 꼼꼼히 글로 남겼다. 기력이 다한 마지막 1주일은 부인이 정리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 '인생이 내게 준 선물'(원제:Chasing Daylight)은 세상의 많고 많은 매뉴얼 중에 가장 비장한 '임종 매뉴얼'인 셈이다.

우연히도, 개꿈을 꾼 바로 그날 만난 한 기업체 임원이 이 책을 내게 건넸다(그러고 보면 개꿈이 아니라 '예지몽'이었을까). 이 책을 건넨 임원도 몇 년전 위암 판정을 받았을 때 이 책을 접했다고 했다. 그는 이젠 절판된 이 책을, 헌책방들을 다 뒤져 한권을 찾아낸 뒤 오프셋 인쇄본을 만들었다. 바로 며칠 전엔 역시 암 투병중인 다른 기업 임원에게 이 책과 함께 위로의 말을 건넸다.

드리워진 그늘이 컸던 거목일수록 쓰러진 뒤 일어나는 먼지와 잡음이 큰 경우가 많다. 이번 주 공판이 시작된 삼성가(家) 재판이 그렇다. 호암 이병철 회장도 어느 누구보다 치밀하게 사후를 대비하고 갔으련만, 지금 자녀들간에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그가 하늘에서 본다면 오켈리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부러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꼭 재산이 많은 그룹 소유주나 CEO만, 그리고 시한부 불치병에 걸린 이들만 준비된 죽음을 맞으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당신이 50세인데, 55세쯤이나 죽음에 대비한 계획을 세우려 한다면 더 일찍 생각해보라. 당신이 30세인데 20년 후에나 계획을 세울 생각이라면 더 일찍 생각해보라" 언젠가 때가되면 자신의 마지막 날을 계획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유진 오켈리가 건네는 말이다.

실상, 죽음을 기획하는 건 잘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시간 이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의 짐은 늘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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