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1번지서 '패닉룸'으로…韓국채 대변신 왜?

22조원. 올해 국내 채권시장에 몰려든 외국인 자금이다. 외국인 자금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하던 정부가 오히려 부담을 느껴 안전장치를 만들 정도로 큰 액수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위기 1번지'로 불리던 한국 국채가 어떤 재난이 터져도 자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패닉룸(panic room·대피소)'으로 위상이 바뀐 덕분에 벌어진 진풍경이다.


◇한국 국채, 국제금융시장서 귀빈 대접 =28일 기획재정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외국인 투자자들은 총 22조4500억 원 규모의 국내 채권을 순매수했다. 만기상환을 제외한 순투자액은 2조7000억 원에 달한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의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는 것은 물론 동남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에서도 한국 국채를 사겠다는 투자 문의가 밀려들고 있다. 이런 막대한 자금 유입은 한국 국채가 세계 투자자들 사이에서 '안전자산'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것을 반증한다.

재정부가 한국 3년물 국고채 금리와 대표적 '안전자산'인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올해 두 금리의 상관계수는 0.95를 기록하며 뚜렷한 동조화(커플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상관계수는 1에 가까워질수록 두 지표의 움직임이 똑같다는 커플링을, 반대로 -1에 근접할수록 정반대로 움직이는 디커플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동안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제 금융시장이 출렁이면 한국 국채를 팔아 자금을 회수, 한국 국채 금리와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상승하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현상이 반복돼 왔다.

실제 글로벌 금융위기 징후가 나타나던 2007년 한국과 미국 국채금리의 상관계수는 -0.36이었다.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를 사기 위해 '위험자산'인 한국 국채를 팔았다는 의미다.

◇'유리몸'에서 '몸짱'으로 재평가 =한국 국채가 '귀한 재산'으로 대접받는 것은 외부에서 우리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외충격에 취약해 '유리몸'으로 불리던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탈)이 그만큼 탄탄해졌다는 평가다.

우리나라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재정위기가 불거진 지난해 3.6%를 기록했다. 올해도 2~3%의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예측된다. 국내적으로는 추가경정예산 편성 얘기가 나올 정도로 위기 국면이지만 유럽, 미국 등 선진국들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돋보인다는 게 국제사회의 평가다.

특히 지난해부터 국제 금융시장이 높은 변동성을 보였지만 국내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시 한국의 국가 CDS 프리미엄은 162.4bp 상승해 전체 국가 평균 상승폭(68.9bp)보다 2배 이상 높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에도 평균 상승폭(24.2bp)을 크게 밑도는 7.4bp 상승하는데 그쳤다. 주요 28개국 중 5번째로 안정된 수치다.

재정건전성도 주목된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약 33% 수준으로 안정돼 있다. 미국(106%) 영국(88.4%) 독일(78.9%) 등 선진국에 비해서 크게 양호하다.

한국에 대한 달라진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가 바로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신용등급 상향 조치다. 무디스는 지난 27일 탄탄해진 경제 펀더멘탈을 이유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1'에서 'Aa3'로 상향조정했다. 등급 전망도 '안정적'으로 제시했다. 상향 조정된 등급인 'Aa3'는 투자 등급 중 4번째로 높은 등급이자, 무디스가 우리나라에 국가신용등급을 부여한 이래 사상 최고 등급이다.

◇안전자산으로 위상 강화 이어질 듯=한국 채권의 위상 강화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해외 투자자들의 '안전자산' 수요는 증가한 반면 금융시장 불안으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무디스, 피치,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 등 주요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재정위기가 불거진 이후 선진국의 국가 신용도를 대거 낮췄다. 23개 주요 선진국 중 신용등급 AAA를 보유한 국가의 비중은 2007년 68%에서 올해 52%까지 떨어진 상태다.

특히 한국 국채의 경우 최근 원화가치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어 투자 리스크가 작고 현금화가 쉽다는 점도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삼성증권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원화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주요 23개 통화 중 변동 폭이 가장 컸으나 올해는 변동 폭이 0.46%에 그쳐 5번째로 적은 것으로 분석됐다.

오현석 삼성증권 연구원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국채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면서 "글로벌 안전자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적합한 대체투자 대상으로 자리매김 해가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과도한 낙관은 금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제금융센터 관계자는 "유럽 주요국가가 흔들리는 매우 특수한 국제금융시장 상황 속에서 한국채권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러 변수가 뒤섞인 복합적 상황 인만큼 안전자산으로 입지가 굳어졌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