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바깥 세상 만난 R&D가 더 빛난다"

"사회가 복잡해져서 이제 더 이상은 융합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개별 기업의 독자 기술, 개별 국가의 독자 개발로 혁신적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융합전도사' 김용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은 한국의 연구개발(R&D) 현실에 대해 '쓴소리' 먼저 쏟아냈다. 우리나라에서 시장의 '판'을 바꾸는 기술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닫힌' R&D 형태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협업과 융합을 통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하지 않고서는 연구실 속 R&D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내 산업기술 R&D 패러다임을 하루 빨리 창의·융합·개방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김 원장의 지론이다.

"중국을 보세요. 기술은 모방하면 금방 따라옵니다. 하지만 기술에 가치를 부여하는 아이디어와 디자인은 따라 하기 어려워요. 연구자들과 R&D 정책 기획자들이 멀리, 넓게 내다보는 융합형 안목이 있어야 시장 선도가 가능합니다."

김 원장은 선진 기술을 일방적으로 도입했던 'R&D 1.0' 단계,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줄이는 데 집중했던 'R&D 2.0'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통해 양적 성장을 이뤄낸 만큼 이제는 질적 성장을 위한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R&D 3.0'이다. R&D 과제를 발굴·기획하고 자금을 지원하며, 연구 결과를 검증하고 평가하는 관리 시스템 전체가 기존보다 한층 '똑똑'해지는 것이 핵심이다.

"우선 지금처럼 기술 중심적이고 일률적인 R&D 평가 방식과 전략을 인간 중심으로 바꿔야 해요. R&D 과제를 수행하는 기업과 연구자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R&D 과제를 사전에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인문학적, 예술적 영감이 불어넣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획일적인 사업계획서와 평가체제가 되지 않으려면 탄력적인 R&D 관리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연구자들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대한 필요성도 언급했다.

"일일이 상세한 증빙서류 첨부를 요구하고 실시간 영수증 관리로 연구자들을 구속하면 연구자와 관리자 모두가 비효율적입니다. '루즈-루즈(lose-lose)' 프레임이 되는 거죠. 연구실 밖 문화예술 활동도 독려하면서 연구자들의 창의적 사고를 충분히 보장해야 합니다. 연구 성과물을 평가 때도 마찬가지에요. 연구자들이 리스크가 큰 연구보다는 검증하기 쉬운 연구에만 집중하게 되는 겁니다. 실패 사례도 공유하고 확산시켜서 도전적인 연구가 많아지도록 유도하는 게 필요합니다."

김 원장은 R&D 체제의 혁신과 빠르게 변하는 세계 시장 트렌드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해법의 첫 단계로 선진 R&D 기관과의 국제 공동기술개발을 강조했다.

"아무래도 혼자 싸우다 보면 힘도 부치고 아이디어도 한정되잖아요. 공동 개발을 하면 비용도 절감하고 개발 기간도 단축할 수 있지요. 또 표준 싸움을 하더라도 공동 전선을 펴면 유리하기 때문에 향후 상용화나 시장 진출에도 수월해집니다."

연구자 스스로의 마음가짐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첨단 기술이 화려한 기능 구현에만 머무르지 않고, 소비자와 진정으로 뜨겁게 만나려면 연구자들 스스로 칸막이를 허물고 이종(異種) 아이디어를 접해야 합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좋은 R&D 체제가 있어도 연구자들이 변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김 원장은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보고 미래 세대를 위한 R&D 인프라 개선의 시급성도 강조했다.

"'과거는 상상하고 미래는 기억한다'는 네이미어의 말처럼 새로운 기술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비롯됩니다. 미래 기술 개발을 위해선 그 기술의 창조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역 1조 달러의 기억을 2조 달러로의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산업기술의 자긍심과 도전정신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며, 이해할 수 있는 산업기술박물관 등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산업기술박물관을 통해 과거를 상상케 하고 미래를 기억하게 하는 것, 이를 통해 기술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일이야말로 선진국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김용근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약력
△전남 순천(56)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행정고시 23회 △산업자원부 산업정책과장 △산업자원부 산업정책국장 △산업자원부 산업정책관 △산업자원부 산업정책본부장 △한국산업기술재단 이사장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