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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몰락과 '금융 환상'

[머니위크]청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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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더 나아가서는 전세계를 호령했던 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그들은 지리상의 발견을 주도하며, 미주 대륙과 서인도 제도에 막대한 식민지를 구축했다. 식민지 구축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시만 해도 유럽 전역의 공통화폐였던 금과 은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두 나라는 자신들이 확보한 식민지에서 거의 반영구적으로 헐값에 금과 은을 들여올 수 있었다.

그런데 세계 최강의 두 나라는 18세기에 이르러 이웃 섬나라 영국에 추월당했다. 이 부분은 근대 금융분야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금융사학자들의 최대관심사다. 오늘날 합의된 결론은 금과 은 같은 화폐가 그 자체로 한 나라의 번영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발달한 금융은 실물경제를 왜곡시킬 수 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지나치게 소비에 몰두했다. 그 대가는 컸다. 넘쳐나는 화폐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민들은 엄청난 물가 폭등을 감내해야 했다. 또한 서비스업과 무역, 특히 노예 무역이 번성한 반면 생산적인 분야는 위축되고 말았다. 스페인 국왕 취임식 비용으로 식민지 금은광 시설의 개량비로 쓸 돈의 몇배를 써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금과 화폐의 역사>, 피에르 빌라르 著).

두 나라의 왕성한 소비경제는 역설적으로 이웃나라의 번영을 불러왔다. 영국과 프랑스는 두 나라에 수출할 물건을 만들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중심으로 한 산업 생산력을 키워야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영국간의 이런 상이한 접근법은 꼭 100여년만에 승부가 나고 말았다. 인도와 아시아에서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영국과 프랑스에 밀려났고, 기존의 식민지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이 일은 케인즈가 이야기 한 '화폐 환상'(money illusion)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가상승으로 명목가치가 뛰게 되면 자신이 더 잘 살게 됐다는 착각을 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보다 큰 틀에서 '금융 환상'(finance illusion)이라는 용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화폐가 넘쳐나면 혹은 금융이 활성화되면 국부가 크게 증가한다는 착각을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이 그랬다. 당시 일본은 엔화 가치가 급격히 뛰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외부에서 화폐가 밀려들어오는 효과를 누렸다. 그 결과 소비나 재테크가 극성을 부렸다. 그간 일본이 자랑하던 산업 생산력은 크게 위축됐다.

미국의 시행착오도 금융 환상이라는 틀로 설명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제조업 경쟁력 위기를 맞자 미국은 금융산업을 포함한 서비스경제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2000년대에 들어 금융이 모든 면에서 사상 최고조에 이르자 미국은 국부를 과신했다. 실은 테러와의 전쟁을 비롯한 미국의 일방주의도 자기 과신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 환상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금융 환상 이후의 오바마 행정부는 다시 제조업 중심의 경쟁력 확보 방안에 골몰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다. 전세계가 당분간은 제조업 경쟁력과 수출을 중심으로 경제를 일으키려 들 것이다. 이를 위해 세계 주요국들은 경쟁하듯 자국 화폐를 찍어내려 들 것이다. 동시에 경쟁국에 대해서는 금융 환상을 미끼로 평가절상을 받아들이라고 유혹하거나 압박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실착을 본 나라들은 이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다. 그 결과는 무역전쟁과 환율전쟁이다.

선진국이 금융 환상의 후유증을 앓는 동안 아시아가 가진 매력이 재조명될 것이다. 아시아는 여전히 산업생산력에 집착하는 후발주자들이며, 무엇보다도 금융 환상의 여지가 많은 곳이고 전세계에서 남아도는 자본이 흘러들 여지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역시 조만간 금융 환상과 관련한 선택을 강요받을지도 모른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6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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