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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제국'을 떠올리며 다시 하는 새해 결심

[뉴욕 리포트]

권성희의 뉴욕리포트 머니투데이 뉴욕=권성희 특파원 |입력 : 2013.01.21 14:05|조회 : 18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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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성인영화로 알려진 '감각의 제국'을 본 것은 29살 때였다. 30살이 임박한 12월의 어느 날, 연말을 홀로 보내는 쓸쓸함 속에 후배가 가지고 있던 무삭제 비디오를 빌려 봤다. 유명세처럼 매우 격하고 적나라한 섹스와 집착에 빠진 여자가 남자를 목 졸라 죽이고 남근을 잘라버리는 충격적인 장면이 가득한 영화였지만 두고두고 가슴을 울리는 깊은 여운이 있었다.

전날 술을 심하게 마셔 머리가 흐리멍덩하고 속이 아프고 만사가 귀찮아질 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 홀로 떨어져 나와 '루저(실패자)'가 된 느낌이 들 때, 언제나 '감각의 제국' 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방에 갇혀 섹스만 하던 남자 주인공이 어느 대낮에 햇볕을 보지 못해 핼쑥해진 얼굴로 밖에 나와 낮은 벽을 따라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는 일본 군대가 총을 어깨에 메고 발걸음을 딱딱 맞춰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며 다가온다. 거대한 물결과도 같은 일본 군인들의 행진을 역방향으로 거슬러 휩쓸려 갈 듯 위태롭게 걷던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뭔가 세상에 조화되지 못하는 듯한 이물감이 느껴질 때마다 묘한 동질감을 불러 일으키며 가슴을 울리곤 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를 오래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단지 과음한지 오래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의 질서 속에 푹 빠져들어 사회의 주류 기조에 보조를 맞추며 살아보고자 숨을 헐떡이며 쫓아가듯 살았던 탓이 컸다.

가정을 꾸리고 중년이 되다 보니 어느덧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지, 아이 교육은 이렇게 시켜야지, 이 정도는 갖춰놓고 살아야지, 이런 데서 손해 보지는 말아야지 등등 정형화된 사회 중산층의 틀에 맞춰 살려 안간힘을 쓰게 된 듯한 느낌이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시작한 습관적인 인터넷 쇼핑몰 방문도 그랬다. 유통업체들이 겨울 상품을 처분하기 위해 크리스마스가 끝난 1월에 제품을 가장 싸게 내놓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정보에 혹해 지난해 12월 말부터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핸드백을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좋은 핸드백을 싸게 하나 장만하자는 생각이었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남들이 알만한 브랜드의 핸드백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회의 유행 혹은 통념에 발맞추려는 욕심이 더 컸다.

얼마 전 자동차를 몰고 가다 앞차를 살짝 친 사고도 그랬다. 기계적으로 앞차 운전사에게 '미안하다(I am sorry)'고 말한 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미안하다'고 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돼 필요 이상으로 많은 손실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설명 때문이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세상엔 손해 보지 않고 똑똑하게 살아가기 위한 지식과 상식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또 이러한 세상 물정에 얼마나 무지한지 다시 한번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 돼야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말아야지, 주류 기조에 맞춰 살아야지. 손해 보지 않도록 '스마트'해져야지 등등 2013년 새해를 맞아 했던 이런 다짐들이 오시마 감독의 별세 소식 앞에 다 허물어져 버렸다.

발이 좀 꼬여 사회의 질서정연한 행진에서 이탈한들 어떠랴. 사회의 주류를 쫓아가지 못해 비주류가 된들 어떠랴. 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걸어간들 어떠랴.

술을 마시지 않은 말짱한 정신으로도 '감각의 제국'에서 그 시대 일본 사회의 흐름을 역행하며 걷던 남자 주인공의 심정이 문득 공감되며 올해는 세상 질서를 거슬러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한 달이 거의 지나 뒤늦게 새로운 결심을 한다. 올해는 손해 보고 살아야지. 올해는 미련하게 살아야지. 올해는 느리게 살아야지. 올해는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내 마음 가는대로, 내 속도대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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