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가입 서류가 '책한권'..'영혼없는 서명' 30번

#회사원 박 모 대리(서울·30대)는 얼마 전 변액보험에 가입하느라 점심을 걸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설계사를 만났는데 서류만 수 십장이 넘었다. 상품 하나에 가입하기 위해 그가 한 서명만 서른 번 이상. 시키는 대로 사인을 하다 보니 어떤 내용에 서명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고객 보호를 위해 받는 서명일 텐데, 오히려 이상한 내용에 동의를 했을까봐 겁마저 난다"고 말했다.


정부가 규제개혁에 나서면서 각 영역별로 '숨은 규제 찾기'가 한창이다. 금융권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보험 가입에 수십 번의 서명을 반복하는 소비자, 배우자의 6촌 이내 혈족 회사라고 우량 채권을 사지 못하는 보험사, 고령화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품규제 등이 대표적이다.

◇보험 가입하는데…, 영혼 없는 서명만 서른 번=

6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고객들이 보험 상품에 가입할 때 하는 서명은 20번이 넘는다. 청약서를 받기 위해 개인신용정보 제공 동의서를 내고, 이를 근거로 청약서가 발행되면 계약 전 알릴 의무사항에 또 서명을 한다. 자금세탁방지법에 따라 주민번호 발급기관, 발급일자를 적어야 하고 계약 유지를 위해 신용정보제공동의를 또 한다. 본격적인 서명은 지급부터다. 상품설명과 관련된 각종 동의 서명이 10회 이상 남았다. 변액보험에 가입하려면 10장이 넘는 적합성 진단 체크도 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니 자신이 어떤 내용에 서명을 했는지 다 기억할리가 만무하다. 고객 보호를 명분으로 받는 각종 동의서가 도리어 가입자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기계적으로 했던 '바로 그 서명' 때문에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얘기다.

◇"6촌이라서"…, 손발 묶인 큰손들=


지난해 말 보험사들의 운용자산 규모는 592조원으로 자본시장의 '큰 손'이다. 하지만 보험업법 상 대주주 자산운용 규제가 우량 채권 및 주식 투자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보험사들은 대주주나 자회사, 대주주의 특수 관계인이 발행한 채권, 주식에 대해 보험사의 '총자산의 100분의 3'과 '자기자본의 100분의 60' 가운데 작은 금액 이하로만 투자할 수 있다.

이 규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부당거래를 막는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지만, 특수관계인의 범주가 광범위해 문제라는 지적이다. 통상 배우자, 그리고 본인의 6촌 이내 혈족이 특수관계인에 포함되는데, 대부분 대기업 계열인 국내 대형 보험사들은 그룹에서 계열 분리가 됐더라도 이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를 들어 삼성생명 등 삼성계열 보험사들은 이미 계열분리가 된 CJ, 신세계 등의 주식·채권에 투자할 때 투자한도 제한을 받는다. 같은 이유로 현대해상은 현대차와 기아차에, LIG손보는 LG, GS, LS에 메리츠화재는 한진 등에 투자제한이 있다.

실제로 보험 등 2금융권까지 대주주 적격성을 심사하자는 논의가 일었던 지난해에도 '6촌 이내 특수관계인'의 범죄행위까지 책임을 무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 일었지만 자산운용에선 이미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한 대형 보험사 자산운용 담당자는 "특수관계인 투자한도 때문에 우량 기업은 그림의 떡"이라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싹쓸이하는 것을 바라만 보려니 씁쓸하다"고 말했다.

◇고령화 시대에…, 손보사 상품 만기는 '15년' 넘지 마라? =

100세 시대를 맞아 저축성 보험의 수요가 늘고 있다. 저축성 상품은 납입한 보험료를 공시이율(은행의 이자 개념)에 따라 불려서 돌려주는 보험 상품이다. 그런데 손보사들은 이렇게 만기 환급금이 100%가 넘는 보험 상품에 대해 '보험기간' 제한이 있다. 정기 저축성 보험은 15년, 세제적격 연금저축상품은 25년이 최대다.

복리가 적용되는 저축성 보험은 오래 둘수록 수익률도 올라간다. 하지만 손보사에서 저축성 상품에 가입한 고객은 15년이 지나면 보험금을 찾거나 새 상품으로 갈아타야 한다. 새로 가입했으므로, 사업비도 새로 내야 한다.

연금저축 상품도 손보사 고객들의 보장기간은 연금개시일로부터 25년이 한계다. 55세부터 연금을 받기 시작했다면 80세가 되면 '끝'이다. 손보업계 관계자는 "15년 제한은 1980년대 후반에 생겼는데, 고령화 시대인 지금까지 적용되고 있다"며 "소비자의 선택권도 제한하는 규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