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러시아의 4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T.S 엘리오트


내일 모레가 4월 20일이다. 한국에 사는 사랄들은 4월 20일이 무슨 날이냐고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조금이라도 살았던 사람이라면 아하! 하고 바로 수긍할 것이다.

이 날은 바로 히틀러의 생일이다. 또, 웬 히틀러의 생일이냐고 반문하겠지만 러시아의 4월 20일은 외국인, 특히 유색인종들에겐 공포스런 날이기도 하다.

그것은 4월 20일 전후로 히틀러를 추종하고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스킨헤드(신나치주의로 히틀러를 부활시키자는 명분하에 움직이는 집단)족이 날뛰기 때문이다. 1990년 대 초반에는 미미해서 별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중반 들어서는 무리를 지어 극악무도한 집단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필자가 사는 동안에도 4월이 시작되면 스킨헤드족이 언제쯤 출몰할 것인가 슬슬 긴장하기 시작하고 중순이 되면 각 대사관에서는 자국민에게 히틀러 생일을 즈음하여 공문을 띄운다. 학교에도 출석하지 말고 되도록 외출을 삼가야하며 특히 전철을 이용하지 말라고 적극 권장한다.


스킨헤드족의 특징은 검정 가죽자켓과 달라붙는 검정바지, 그리고 허리벨트에 쇠로 만든 체인을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는 올백으로 밀어버린다. 이런 행색만 보아도 섬��한데 지하철이나 시장 같은 장소에서 백인보다는 유색인, 즉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에게 심하다. 그들에게 러시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광폭한 언행을 일삼는다. 한국 유학생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일을 당하곤 했다. 이렇게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고 해마다 빈도가 강해져 공권력도 무색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처음 대통령(1999년 12월 30일)에 올랐을 때 아주 강력하게 그들을 응징했고 들리는 말로는 모두 다른 지방으로 �i아내 모스크바는 한동안 잠잠하고 평온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 고약한 집단은 다시 고개를 쳐들자 다른 한편에서는 한 야당 당수를 지목하며 그가 이들을 지원한다는 설도 있었다. 경우야 어쨌든 러시아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4월이 되면 혹 외출할 일이 있으면 택시를 타거나 아니면 아예 집에만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느꼈다. 백주대낮에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데도 스킨헤드족은 늘어나고 국가에서 손을 쓰는지 어쩌는지 알 수 없이 공포스러운 4월은 매 해(年) 계속되었다.

사실 러시아와 독일 정부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는데 독일의 히틀러를 숭배하고 추종한다는 것이 우스웠는데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독일과의 전쟁을 잊지 않고 젊은이들에게도 잊지 말라고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빗장을 열고 자본주의 체제로 건너오면서 야기되는 사회적인 현상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혼란과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이탈되는 불만과 고독과 외로움을 타인의 학대로 자신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풀고자하는 젊은이(사실은 불량스러운)들이 사회악으로 전락된 것을 직접적으로 겪으며 러시아의 한 면을 보았다.

하긴 이렇게 무리를 지어 집단을 만들고 악랄한 행동을 하는 류의 인간들은 이 세상 어디에나 혹은 어느 시대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남에게 악행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비열한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말도 안되는 고약한 집단이야말로 사회를 좀먹는 종족이 아닐까 싶다. 또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도덕성을 상실한 채 악의 축이 되는 집단도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런 국가도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코 러시아의 스킨헤드 같은 부류의 집단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4월 중순이 지나고 아파트 단지에 보라색 라일락이 수줍은 듯 향긋하게 피어오르자 문득 러시아의 끔찍하고 잔인했던 4월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