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낸 건보료가 새고 있다" 지난해 환수액만 3838억원

#인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의사 이 모 씨와 박 모 씨는 주 2회, 의사 배 모 씨와 영양사 황 모 씨는 주 3회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병원 측은 이들이 모두 상근 근무를 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신고했다. 아예 근무한 적이 없는 영양사 이 모 씨도 상근 근무자 명단에 올렸다. 이렇게 하면 의사 3명이 근무해 가산금 20%를 받을 수 있고 , 영양사도 2명이 근무하면 1끼당 1270원의 가산금을 챙길 수 있어서다.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건보공단)은 현장 심사를 거쳐 이 같은 위법 사실을 확인하고 보건복지부에 현지 조사를 의뢰, 2010년 3월부터 1년간 병원 측이 부당 청구한 2억3600만원을 환수했다.

#가슴을 키워준다는 일명 '자흉침'으로 유명한 서울의 한 네트워크 한의원. 이 한의원은 건강보험 급여대상이 아닌 가슴확대 시술을 하면서 건강보험 급여대상 치료를 했다고 속여 2011년 말부터 1년간 환자 1만1695명의 진료비 1억2658만원을 건보공단으로부터 불법으로 챙겼다. 건보공단 조사 결과 다른 네트워크 한의원 3곳도 같은 수법으로 수 억원을 받은 정황을 포착했다. 건보공단은 해당 한의원을 현장 조사하려 했지만 환자들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한의원은 부랴부랴 폐업한 상태였다.

건강보험료(건보료)를 눈 먼 돈으로 생각하는 악의적인 의료기관과 보험자 탓에 건보료가 줄줄 새고 있다. 20일 건보공단에 따르면 부당 청구 및 진료로 확인돼 지난해 건보공단이 환수 결정 조치를 한 금액은 3838억원으로 집계됐다. 의료법 상 불법인 사무장 병원(정식 의사가 아닌 사람이 건보료를 챙기려고 차린 병원)에서 청구한 금액이 2153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산재나 교통사고를 은폐한 후 건강보험으로 청구한 금액이 981억원으로 뒤를 이었다.

부당청구 유형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남의 한 병원은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비급여 대장 내시경 검사를 실시한 후 보험 대상인 '장증후군' 환자라고 속여 1900만원을 타냈다. 또 다른 병원은 의사수가 많으면 종합병원으로서 가산금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악용해 의사 이름만 걸어놓는 수법으로 10개월간 가산금만 4585만원을 받기도 했다.

의료기관 뿐 아니라 보험 가입자들의 불법 행태도 천태만상이다. 생활형편 탓에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던 남성 A씨는 유방암에 걸린 부인 B씨가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전처 C씨의 주민번호를 도용해 5077만원 상당의 진료를 받게 했다.

외국에 거주하던 D씨는 자신의 동생 E씨의 의료보험증을 도용해 한국에서 췌장암 치료를 받아 건보공단이 진료비로 3400만원을 쓰도록 했다.

◇드러나지 않은 것 고려하면 2조~3조원까지도 추정=문제는 건보공단에 발각된 사례보다 현실의 건보료 재정 누수는 훨씬 심각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은 전체 건보료 대비 환수되는 비율이 5% 수준"이라며 "한국은 그러나 0.5%에 불과해 환수 비율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건보공단은 실제 재정 누수 규모는 현재 환수 금액의 10배 수준인 2조~3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김종대 건보공단 이사장은 직접 전국 지사를 방문해 재정 누수 사례를 보고 받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청구·심사권이 건보공단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분리된 현 구조상으로는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공단은 건보료를 징수하고 관리하는 의무만 있을 뿐 부당 청구를 사전 차단할 수 있는 청구·심사권은 없다"며 "의심 되는 의료기관이나 가입자는 청구 단계부터 막아야 하는데 이 권한이 없어 재정 누수를 막는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건보공단이 청구단계부터 심사를 맡고, 전문적인 청구심사는 다른 기관에 맡기는 이중 구조로 재정 누수를 막아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