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고용모델은 '27-28-25', 새 패러다임 필요"

21일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열린 '한국 고용시스템의 문제점과 개혁' 포럼. 정면 왼쪽 두번째부터 이채필 전 고용노동부 장관,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본부장/사진= 서울대 행정대학원

'27년간 부모 도움으로 교육을 받고, 28년간 회사에 고용돼 일을 하며, 퇴직 후 25년간 직업 없이 살다 죽는다.'

대한민국 현재 고용시스템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른바 '28~55세 고용모델'로 불리는 이 시스템에서 혈기 왕성한 시기에 장시간 집중 노동을 한 후 그 후엔 기업 바깥으로 내몰린다는 것을 빗댄 것이다. 임금체계나 직제가 직무·숙련별로 구분돼 있지 않은 탓에 연공적(호봉제) 승진이나 임금 요소가 강해 고위직으로 승진한 일부만 살아남는 시스템이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노사사회정책연구본부장이 진단한 한국의 고용 패러다임이다. 배 본부장은 21일 오전 서울대 행정대학원이 '한국의 고용시스템, 문제점과 개혁'이란 주제로 마련한 포럼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날 발제를 맡은 배 본부장은 "출생 후 대학교 졸업까지 27년간 부모 부담으로 자라고, 55세까지 28년간 장시간 일하고, 퇴직 후 죽을때까지 25년간 직업없이 지내는 등 80세 인생중 1/3만 고용돼 일한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장시간 근로 문화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고용 패러다임이 자리 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 본부장은 "우리나라는 선진국들보다 연간 325시간, 8주 이상을 더 일하고 있다"며 "장시간 노동 때문에 여성 고용률은 저하되고, 왕성한 세대에 의한 노동 독점으로 일자리 나누기가 부진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업들이 장시간 노동으로 비과학적인 노동시간 관리, 낮은 생산성, 노동 투입 위주의 낡은 생산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어 혁신이 지체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포럼을 주최한 이채필 전 고용노동부 장관(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도 "제조업 생산직 위주로 장시간 근로하는 우리 고용문화가 외환위기나 경제사회 변화에 따라 바뀌어야 함에도 크게 변화된 게 없다"며 "경제주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낙후된 고용시스템, 잘못된 일하는 문화를 바꿔야한다"고 강조했다.

배 본부장은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노동시장의 공정성·통합성 개선 △낡은 경제산업구조 개혁△금융·조세·복지정책 연계 △생애주기적 관점에서 고령자·여성 고용 △고용조건 산업·업종별 표준화 △노사관계 틀·제도 보완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의 고용시스템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새로운 제도 도입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단순히 통상임금 등과 연계된 임금체계 개편, 정년 연장, 비정규직과 사내 하청 근로자 차별과 공정성, 청년과 여성고용, 시간선택제 등에 이르는 개별 고용이슈들만 챙겨선 지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배 본부장은 특히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낡은 구조를 바꿔야 새로운 고용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제산업 구조 개혁이 결국 고용체제도 바꾼다"며 "대기업의 시장 지배구조와 수익의 승자독식 시스템을 개혁해 독과점 구조와 수직 지배적인 하청관계를 바꿔 부당한 지배와 간섭을 없애고 공정한 거래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정책적 역량도 강조했다. 배 본부장은 "정부가 고용률 70%의 달성을 중요한 목표로 내걸었지만, 일자리의 질이나 고용시스템 문제에서 비롯된 이슈들에 대한 적절한 대응전략이 없다"며 "일자리의 양적 증가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들에 쏠려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 전 장관 역시 "하나의 정책에 국한된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고용문제 전체를 포괄하는 논의를 해야하고,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힘을 쏟아야한다"며 "새로운 고용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과거 잘못된 시스템을 개혁하고, 선도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공론화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