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폐쇄' 400兆 신시장, 한국은 예산 '0원'

경북 울진군 북면 한국수력원자력 신한울 원자력발전소 공사 현장./사진=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세계 각국의 원전 정책 흐름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원전을 짓는 데만 역량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잘 부수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최소 400조원이 넘는 원자력발전소 폐쇄, 이른바 '폐로(廢爐)'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폐로 예산이 현금으로는 한푼도 없을 정도로 소외돼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23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원자력 업계에 따르면 주요 원전 국가들은 최근 앞 다투어 폐로 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일본은 후쿠시마에 폐로 공동연구거점 '안전폐지조치국제공동연구센터'(가칭)를 2016년 설립할 계획이다.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나 미국 스리마일 섬 사고 등의 수습을 경험한 세계 5개국 전문가를 초청해 로봇 원격제어, 원자로 내 오염수 제거 등을 연구하게 할 방침이다.

여기서 확보한 기술과 경험으로 자국내 후쿠시마 원전 1호기를 안전하게 폐로하는 동시에 세계 폐로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본뿐이 아니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원전 강국들도 제각각 폐로 관련 연구개발 사업을 진행하며 기술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원전 폐로 시장은 원전 건설 시장에 맞먹는 신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해 말 전 세계 가동원전 435기 가운데 149기는 이미 폐로가 결정됐다. 수명연장을 승인 받아 계속운전 중인 150기 등을 포함해 60년 내에 400여기의 원전이 폐로에 들어가야 한다.

정부가 추정한 폐로 비용은 원전 1기당 6033억원. 여기에 사용 후 핵연료와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비를 포함하면 총 비용은 원전 1기당 1조원 이상으로 늘어난다. '최소비용'에 가까운 정부 추정치만으로도 400조원에 달하는 시장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국내 원전 운영 주체인 한수원이 31년간 쌓아온 폐로 비용은 현금 기준 '0원'이다. 기술도 선진국 대비 절반 수준. 안전성 논란을 빚는 월성 원전 1호기에 대해 폐로 결정이 당장 내려진다 해도 실제 작업이 가능한 건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이 흐른 후에나 착수가 가능한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연구로와 우라늄 변환시설 및 핵주기 시험시설 등 비교적 단순하고 방사선 위험도가 낮은 시설을 대상으로 한 '원전해체기술'을 개발해 왔다. 원전 해체 핵심 기반기술 38개 가운데 17개 정도만 갖춘 상태다. 설비용량 1000㎿가 넘는 상용 원전의 폐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원자로 시설의 최초 설계수명기간 만료시 계속 운전을 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규제하는 내용의 원자력안전법 개정안이 제출되는 등 국내 정책 여건도 급변하고 있으나 현재 역량으로는 대응이 힘든 것이 현실이다.

원자력업계 관계자는 "국내 원자력업계의 사정을 감안할 때 정부가 노후원전에 대한 폐로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자금 및 기술 확보에 최소 수년이 걸리는 만큼 지금부터라도 정부가 폐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