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만 서두르는 탄소배출권거래제, 국가에 이득인가

2015년 9월 1일. 국내 굴지의 철강 회사에 다니는 김 모 과장은 여의도 한국거래소 ‘온실가스 배출권 현물시장’으로 바로 출근한다.

이날 김 과장이 회사를 대신해 온실가스 배출권(탄소 배출권)을 사기로 했기 때문. 이곳에서 김 과장은 대학 동창 박 모씨를 만난다. 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박씨는 회사가 지난 여름 잠시 공장 가동을 중단(셧다운)했을 때 잉여분이 생겨난 탄소 배출권을 팔고 있다. 전력거래소에서 전력 초과분과 부족분이 거래되듯 온실가스도 초과분과 부족분이 맞교환되는 시장이 생긴 것이다.


이르면 내년 1월부터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도가 우리나라에서 시행된다. 2012년 기준 우리나라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비율은 전세계의 1.8% 수준인데도 중국(28.6%), 미국(15.1%), 인도(5.7%), 러시아(5.1%), 일본(3.8%) 등 온실가스 배출 상위국보다 훨씬 서둘러 시행한다.

정부는 당초 내년초 강행 방침이었으나, 산업계의 반발 등으로 인해 시행시기나 과징금 규모(이산화탄소 톤당 최대 10만원)를 조절하는 방안을 고려중이다.

◇탄소 배출권 거래제 시행시 철강업 가장 타격..산업 전체 연간 매출 손실액 8조 이상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도는 정부가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정한 뒤 각 기업에 배출량을 할당하고, 배출권을 기업끼리 거래하게 만든 제도다. 배출권 총량은 2020년 예상 배출량의 70% 배출을 목표로 잡고, 해마다 목표에 맞춰 일정량을 줄여나간다.


기획재정부는 배출권 거래제 시행 시기를 1기(2015~2017년), 2기(2018~2020년), 3기(2021~2025년)로 나눴다. 각 기간이 끝날 때 기업이 배출권을 갖고 있지 않으면 부족분만큼 시장가격의 3배에 달하는 과징금을 물어야 한다. 과징금을 내고 싶지 않다면 다른 기업에서 사들여야 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탄소 배출권 거래제 시행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산업은 철강업이다. 배출권 거래제 시행시 철강업계 전체 연간 매출이 5조1618억원이 줄어든다는 것.

정유, 광업, 석유화학, 비철금속, 자동차, 반도체, 전기·전자, 기타 제조업까지 모두 합친 우리나라 산업계의 연간 매출 손실액은 8조4249억원으로 추정됐다. 이는 톤당 이산화탄소의 가격을 2만5000원으로 산정했을 때 나오는 숫자다.

철강업 대표주자인 포스코의 경우 예상 매출 손실을 줄이기 위해 이산화탄소 혁신 기술 개발에 2018년까지 1조 5000억원을 투입하고 탄소 저감 대책 관련 팀을 따로 만들어 전사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중국·미국·인도·러시아·일본 등 주요국 교토의정서 불참
주요국은 자국 산업경쟁력이 약해지는 것을 우려해 국가단위의 배출권거래제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중국·미국·인도·러시아·일본 등 5대 온실가스 배출 상위국이 교토체제에 모두 불참해 교토의정서 체제는 사실상 와해된 상태다. 미국은 교토의정서 탈퇴 선언을 했으며, 중국과 인도는 원래 감축 대상국이 아니다.

2011년 12월 제17차 당사국 총회 당시 일본·러시아·캐나다는 교토의정서를 탈퇴하진 않지만 이후 절차는 진행하지 않기로 하고, 2차 공약기간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다만 유럽연합(EU·28개 회원국)과 뉴질랜드 등 일부 국가에서는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되고 있다. 유럽은 서비스 산업 중심이라 배출권 거래제 적용이 좀 더 쉬운 측면이 있다.

이와 관련 장현숙 무역협회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처럼 제조업 중심 국가인 일본의 경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장 연구위원은 "일본은 28개 개도국 현지에 탄소저감장치를 설치해주는 대신 저감량에 대한 탄소 배출권을 가져오는 협상을 진행 중"이라면서 "교토의정서를 이행하지 않는 명분이 되는 동시에 개도국에 일종의 ODA(공적개발원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업종별 배출 할당량 과소 예측...기업들 "정부 주도로만 시행되는 것 문제"
탄소 배출권 거래제의 내년 시행과 관련해 우리 기업들의 불만은 많다. 우선 기업들은 정부가 지난 5월 발표한 2015∼2017년 업종별 온실가스 배출 할당량에 문제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환경부가 2009년 산정한 연도별 온실가스 배출량 전망치(BAU)를 기준으로 업종별 배출 할당량을 정했지만, 과소 예측됐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10년 실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2020년 상황을 분석한 결과 정부 예측치보다 10%(8600만톤) 더 많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2012년의 경우만 봐도 2009년 BAU가 예측했던 2012년 배출량 수치보다 2800만톤 더 많은 이산화탄소가 발생했다.

배출총량과 업계 할당량에 대해 정부가 산업계와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이같은 과정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모양새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최기련 아주대 에너지학과 명예교수는 "기술개발 등을 통해 탄소 배출을 줄일 수도 있는데, 정부가 일방적으로 기업별 배출량을 할당해 시장 원리에 어긋난다"면서 "정부와 기업이 활발히 논의해도 배출 예상치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운데 정부 주도로만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