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향연' 러시아 재래시장

한국에 늦장마가 찾아와 또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인명 피해까지 겹쳐서 마음이 여간 착잡하지 않다. 이래 저래 마음을 편히 가질 날이 없는 것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정신적인 공황 상태로 몰아가는 것 같다. 쏟아지는 폭우와 물속에 잠긴 자동차들을 보며 잠깐 러시아 홍수가 떠올랐다.


정확하고 확실하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한 여름이 지나고 러시아에 엄청 나게 큰 홍수가 찾아와 한꺼번에 수 십 명(수백명?)이 수마에 쓰러졌다. 그 뉴스가 나오자 그 때 집권하던 (현재도 집권 중) 푸틴이 다음 날 즉시 사망자의 숫자에 맞춰 관을 준비해 홍수 재난지역으로 보낸 것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었다.

올해는 추석이 보름 정도 앞당겨져 벌써부터 추석 수요를 잡고자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비롯해 소형 마트와 골목상권, 그리고 재래시장까지 홍보와 마케팅 경합을 벌리고 있다.

한국에는 이제 대형마트가 자리 잡은 지 오래 되었고 별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이용하는 추세다.

필자가 살았던 처음 러시아에 발을 내디딘 것은 1992년 7월이었고 두 딸과 함께 본격적으로 생활을 하게 된 9월 이었는데 러시아는 바로 <그 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시절이었다. 두 딸은 어렸을 때라 <그 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를 당연 몰랐고 처음에는 전철 타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던지 전철 타기를 고집했다. 그러더니 한 두어 달 지나니까 “아이고, 힘들어...이제 전철 못 타겠다!” 를 연발하고 다리를 뻗었다. 매일 눈이 억수로 내리고 바람이 칼처럼 불어대니 어린 체력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딸은 그렇게 자신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한국의 어려운 시절을 러시아에서 겪었기 때문에 한국에 나와서 나이 드신 어른들과 대화를 할 때 아주 쉽게 공감하곤 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식주라고 하는 것을 러시아에 살면서 뼈저리게 체험했다. 입을 옷이야 한국에서 많이 가져갔으니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살 집도 구했으니 일단은 안심이었는데 먹을 것이 제일 큰일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고추장 된장 간장 라면 고춧가루 젓갈 등 생필품은 거의 다 공수를 했지만 매일 먹어야 하는 어떻게 보면 가장 일용할 양식인 채소나 쌀은 어찌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제일 먼저 구입한 것은 러시아 국영 마가진(슈퍼마켓)에서 길쭉한 쌀과 칼바사(쏘세지), 우유였다. 처음 본 러시아의 국영 마가진은 정말 황당함 그 자체였다. 물건도 아예 없었다. 빵(종류가 2-3개)과 칼바사, 우유, 쌀, 그리고 몇몇 생필품 들이 전부여서 실내가 텅 빈 것 같았는데 물건을 구입할 때 바로 구입하는 게 아니었다.

우선 까사(전표 주는 곳)에서 구입할 종목과 가격을 이야기 해주면 직원이 전표를 끊어주면 그걸 가지고 물건과 마꾸었는데 모든 직원들이 푸르스름한 옷에 어찌나 불친절하고 고약한지 정나미가 뚝뚝 떨어졌다. 그나마 재수 좋게 계란이라도 있으면 횡재하는 날이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에도 재래시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포 지인과 함께 러시아 제 1의 재래시장인 중앙시장(러시아도 가장 좋은 곳은 항상 “중앙”과 “1“이라는 숫자를 표기해서 최고임을 강조했다)을 갔다.
와--우, 이런 데가 있다니, 그곳은 바로 신세계였다.

우선 시장이 돔 형식으로 천장이 엄청 높은 실내였는데 생기가 넘쳐났고 시끌벅적한 것이 정말 시장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야말로 시장통이었다. 무슨 싸움꾼들이 싸우는 듯한 어조로 손님을 호객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시장에 러시아 사람은 거의 없고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키르키스탄 등 이런 나라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표준어 보다 사투리가 아주 심해 듣기 거북하고 웃음도 나왔다.

러시아 제일의 중앙시장은 천국의 향연이었다. 온갖 과일과 고기는 물론이고 종류도 어마어마했고 신선도는 최상급이었다. 연어와 연어 알, 캐비어, 절인 청어, 종류별로 있는 올리브,갓 구운 빵, 등등, 그리고 각 나라의 싱싱한 꽃들, 꽃향기를 맞는 곳에서 소, 돼지를 도축하고 양고기, 말고기와 함께 온갖 유제품, 소 혀, 돼지 혀, 그리고 꿀과 초코렛, 케익은 말할 것도 없고 쌀과 채소도 기가 막히게 많았다.

정말 필자의 눈이 핑핑 돌았다. 쌀은 찹쌀(러시아에서 찹쌀이라니!)도 있었고 노랑 쌀, 붉은 쌀, 채소는 파, 마늘, 생강, 부추, 배추, 무, 시금치, 빨간 무, 하다못해 갓 까지 있었다. 필자는 파김치와 갓김치, 오이소박이를 담가 먹었고 약식도 만들어 먹었다. 이러니, 천국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 있는 종류보다 훨씬 더 많았다. 가격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가진보다 훨씬 비쌌다. 그러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재래시장에는 없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본격적으로 중앙시장을 애용했다. 다음에는 중앙시장에서 겪었던 공포의 시간에 대해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