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책통]호흡이 긴 경제서가 인기를 끄는 이유

몇 년 전 일본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나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같은 소설이 100만 부 이상 판매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최근 돌아본 일본의 서점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고전이 잘 팔리는 분위기가 크게 감지되고 있었다. 고전 중의 고전에 속하는 ‘성경’ ‘논어’ ‘손자병법’ 등을 비롯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케인즈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등은 큰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아마티아 센의 ‘불평등의 재검토’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하이에크의 저작들도 강세를 띠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 잡지는 이렇게 ‘호흡이 긴 경제서의 스테디셀러가 다시 인기를 끌게 된 이유로 경제서를 번역할 수 있는 새로운 번역가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번역이란 무엇인가’ ‘직업으로서의 번역’ 등의 저자인 야마오카 요이치(2011년 작고)가 고전번역의 중요성을 설파했을 뿐만 아니라 고전 번역 아카데미를 열어서 후학을 양성한 것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한 효과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니케이BP 클래식’ 시리즈의 한 권인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는 미국에서는 초 롱셀러였지만,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개혁 당시 잠시 팔리다가 절판된 상태였다. 일본에서 신자유주의가 아무리 질시당한다고는 해도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에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야마오카의 제자인 우라이 아키코가 이 책을 새로 번역해 2008년에 내놓자 지금까지 10쇄 3만 부가 팔리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 시리즈의 기획자는 경제서는 대학교수가 번역해야만 한다는 상식을 뒤엎었을 뿐만 아니라 읽기 쉬운 번역서를 내놓기만 하면 잘 팔린다는 사실이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갈브레이스의 ‘대폭락 1929’가 팔리자 독자들이 문제해결에 대한 해답을 고전에서 찾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일본 출판계는 기간도서의 복간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창업 100년을 자랑하는 이와나미쇼텐이 발행한 책은 모두 3만여 종. 이 중에서 지금 팔리고 있는 책은 불과 수천여 종에 불과하다. 이와나미의 편집자들은 자사의 홈페이지를 통해 독자들의 복간요구를 확인하는 한편 중고시장의 동향까지 파악하면서 잠자고 있는 구간도서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최대의 과제로 삼기 시작했다.

‘교양으로서의 경제학’ ‘경제는 세계사에서 배운다’ ‘케인즈는 지금 왜 필요한가’ ‘처음 만나는 마르크스’ 등 고전을 읽기 위한 입문서들도 속속 잘 팔리게 되면서 이런 책을 읽은 독자들이 고전을 다시 찾는 연속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갈수록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지금, 고전은 일시적인 붐을 뛰어넘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성찰함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의 서점가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