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당하고 직원이 빼가고" 스파이에 멍든 中企

제공=법무부.

"대기업에 당하고 직원까지 기술을 빼가니까 하마터면 회사가 문을 닫을 뻔 했다. 기술유출로 망하는 중소기업이 한 두 군데가 아닐 거다"


견실한 섬유 봉제기계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S사 김모 대표는 최근 2년새 그야말로 '지옥'을 맛봤다. 대기업과 내부 직원이 잇달아 핵심기술을 빼돌리는 바람에 피땀 흘려 일군 회사가 자칫 휘청거릴 뻔 했던 탓이다.

국내 최초로 기술개발에 성공해 수입에 의존하던 기계를 국산화한 이력도 갖고 있는 김 대표였지만 애지중지하던 기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새나간 건 순식간이었다.

김 대표는 대기업 C사와 기계 납품계약을 체결하면서 상대의 끈질긴 요구로 프로그램, 설계도면을 건넸다 1년여 후 C사의 공장에서 납품하지 않은 똑같은 기계가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청와대 신문고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변호사를 통해 법에도 호소해 봤지만 기술유출 증거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법원은 증거부족을 이유로 C사의 손을 들어줬다.


"진짜 중요한 기술은 오랜 노하우가 집약돼 있기 때문에 특허로 공개하지 않고 감추는 기업이 많아요. 특허가 아니면 영업비밀 요건을 갖춰야만 보호 받을 수 있단 걸 사고가 일어난 후에야 알았어요."

올해 들어서는 아끼던 직원이 2012년 퇴사할 때 주력기계의 도면을 통째로 들고 나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설계 기술자였던 송모씨는 몰래 빼간 설계도면으로 경기 안산에서 기계를 생산해 중국시장에 판매하려고 시도하다 덜미를 잡혔다.

송씨는 중국인 투자자로부터 3000만원을 받고 기계를 만든 후 중국법인의 지분 일부를 받기로 하고 일을 꾸몄다. 그러나 송씨가 기계를 만드는 데 차질을 빚자 중국인 투자자는 김 대표를 찾아와 "송씨가 기술을 유출했다"며 "만들다 실패한 기계를 가져다 줄테니 증거물로 쓰고 부속품 값을 쳐달라"고 요구했다. 지난 2월 김 대표의 신고로 서울지방경찰청 산업기술유출 수사팀은 송씨를 검거, 검찰에 송치했다.

"대기업한테 당하고 나서 영업비밀 교육도 하고 보안도 강조했지만 직원이 등산 가방 메고 자전거타고 출퇴근하면서 도면과 부품을 빼돌렸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CC(폐쇄회로)TV 달고 보안담당도 두고 있지만 마음먹고 빼돌리면 못 당해요."

송씨가 유출한 기술로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해 중국시장에 판매까지 했다면 S사는 적잖은 손실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기술유출로 기업의 존폐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는 중소기업에겐 '남의 일'이 아닌 셈이다.

23일 법무부에 따르면 검찰의 기술유출범죄 처리 건수는 2005년 207건에서 2010년 356건, 2011년 439건, 2012년 448건, 지난해 459건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제공=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최근 6년(2009년~2014년9월)간 국내기술이 해외로 유출된 253건을 세부 분석한 결과 첨단기술이 집약된 전기전자 분야(33%, 84건)에서 유출이 집중됐다. 기계(75건), 정보통신(27건), 화학(13건), 생명공학(8건) 등의 분야에서도 유출이 빈번했다.

신분별로는 전직 직원이 '스파이'를 자처한 경우가 134건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현직 직원은 67건, 협력업체는 21건, 유치과학자와 투자업체는 각각 2건, 1건 순으로 빈번하게 기술을 빼돌렸다.

피해업체는 중소기업이 67%(170건)로 대기업 18%(45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기술개발에만 집중한 나머지 보호에 소홀하거나 보안시스템 확보, 개발 성과 보상 등에 신경을 쓰지 못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기술유출이 끊이지 않는 것은 범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에 비해 처벌이 경미한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2003년 29.7%이던 기술유출 범죄 기소율은 2012년 12.8%로 낮아졌고 '혐의 없음' 비율은 37.6%에 육박했다.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에 따르면 2011년 기준 법원에서 영업비밀 유출 사건의 유죄율은 76.9%로, 일반사건(80.6%)에 비해 낮은 편이다. 양형은 집행유예가 66.0%, 벌금형이 16.0%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실형이 선고되더라도 1년 미만이 6%, 3년 이상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기술을 빼돌려 얻을 수 있는 금전적 보상과 고액연봉, 승진 등 경제적 이익에 비해 적발됐을 경우 받는 처벌이 단기징역, 집행유예 정도에 불과해 예방효과가 극히 미약한 실정이다.

기술유출을 주도한 피의자들 상당수가 초범인데다 적발 당시 범행이 미수에 그칠 경우 이로 인한 현실적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것도 양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이 기술유출을 여전히 생계형 범죄로 인식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유출 관련 민·형사 재판이 1년 내에 확정되는 경우가 전체의 절반에 못 미쳐 재판이 장기화될수록 중소기업에 불리한 결과로 이어지는 점도 문제다.

산업기밀보호센터 관계자는 "어쩌면 살인, 강도, 절도 등 범죄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또는 기업, 국가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죄에 대해 너무 관대한 처벌이 뒤따르고 있다"고 개선 필요성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