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책통]‘정의’를 묻기 전에 인간의 존엄성부터 지켜야

“울워스가 문을 닫다니 아쉽군. 이제 그 많은 차브(chavs)들은 어디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까?” 울워스는 미국의 다국적 대형 유통업체로 영국에서는 2008년에 폐업했다. 그렇다면 ‘차브’는? 오언 존스의 ‘차브’(북인더갭)에 따르면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이다. “슈퍼마켓 계산대의 계산원이거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또는 청소부” 같은 노동계급을 모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올해 30세인 오언 존스는 대처 정부가 ‘영국병’을 고친다는 이유로 탄광 노조를 굴복시키고 산업의 틀을 제조업에서 금융 정보 엔터테인먼트 등 비제조업으로 바꿔 나간 것으로부터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때 제조업이 강제로 폐기되자 지역사회의 구성원이자 안정적 소비층이었던 노동계층이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공동역자 중 한 사람인 이세영은 ‘차브’에 견줄 만한 국내의 신조어로 ‘잉여’를 손꼽는다. ‘정규군 사회’로의 편입 기회를 봉쇄당한 20대가 스스로를 얕잡고 조롱하는 말이 잉여다. 이세영에 따르면 “잉여가 상승 기회를 박탈당한 중간계급 2세들의 자기연민의 표현이라면, 차브는 몰락한 2세들에 따라붙는 저주의 꼬리표”라는 것이다.

자기연민의 표현이든, 저주의 꼬리표든 젊은 세대를 비하하는 말은 꼬리를 잇는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 일자리·소득·집·연애(결혼)·아이·(미래에 대한)희망이 없는 ‘6무(無) 세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쌓았지만 비정규직 일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케아 세대’ 등은 모두 젊은 세대를 애처롭게 보면서 동시에 비하하는 언어다.

설사 이 세대가 취업을 한다 해도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워킹푸어’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과거에는 기술이 인간의 근육을 대신하는 제조업 등의 일자리를 앗아갔지만 지금은 로봇, 고성능의 소프트웨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의 자동화가 인간의 머리를 대신하는 지식노동의 일자리까지 급속도로 빼앗아가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중산층이 붕괴되면서 1명의 엘리트 사원을 지원하기 위해 99명이 단순 사무직이나 빌딩 청소원, 편의점이나 외식 산업 등에서 일하는 ‘맥잡(맥도날드의 아르바이트 같은 저임금 단순노동)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오언 존스는 양질의 일자리, 공공주택 건설 등의 대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가능할까? 2010년 이후 우리는 마이클 샌델의 책을 읽으며 ‘정의’나 ‘도덕’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존엄을 물어야 할 때다. 페터 비에리는 ‘삶의 격’(은행나무)에서 “타인으로부터 우리가 주체라는 사실을 무시당하거나 수단으로 악용당할 때 우리는 굴욕을 느낀다. 굴욕은 우리에게 존엄성을 앗아가는 행위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굴욕감을 느꼈을 때 무력감에 빠져든다. 그런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부터 찾아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