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시계 시장 급성장, 이면엔 '시계 재테크' 시장?

롤렉스 서브마리너 116610LN

#나는 '롤렉스 서브마리너 116610LN'이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 롤렉스 가문은 한국에서 희소했다. 경우에 따라 내가 백화점에서 팔린 '몸값' 보다 더 많은 가치를 주고 되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나의 가치는 여전히 시간의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젠 희소하지 않은 대신 나를 찾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백화점에서 구매하려면 길게는 반년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파텍필립 월드타임 5131'이다. 175년 역사를 지닌 우리 가문은 '명문 중의 명문'이다. 10년 전 한국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요즘 이상하게 내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 어제 저녁 나는 주인님과 함께 주인님의 지인을 만났다. 그 자리에는 두 분이 좋아하는 싱글몰트 위스키 '맥켈란'과 쿠바산 최고급 시가 '코이바'도 있었지만 두 분은 나의 혈통과 가치에 대한 대화만 나눴다. 그날 나는 나의 원래 몸값 보다 비싼 가격에 주인님의 지인에게 팔렸다.

'200년에 가까운 브랜드 역사, 한 해 1000개 생산되는 희소성, 아파트 한 채에 맞먹는 가격…'

고급 수입 시계의 가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동시에 와인과 패션잡화 등 가격 이상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소비재 중 시계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시계만큼 역사성과 희소성, 경제적 가치를 두루 갖춘 소비재는 드물다. 이 같은 요소가 맞물려 최근 수입시계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리는 부분이 하나 더 생겼다. 이른바 '시계 재테크'가 가능한 '중고 시장'이다.

파텍필립 월드타임 5131

10년 전만 해도 수입시계 중고시장은 '없던 시장'이나 다름없었다. 국내 수입시계 시장 자체가 작았던 때문이다. 2004년 리치몬트코리아와 스와치코리아, 한국로렉스 등 국내 주요 10개 수입시계 업체 매출 합계는 중소기업 연간 매출 규모인 2000억원 수준이었다. 서울 강남 반포에서 중고 수입시계 매장을 운영하는 A씨는 "당시만 해도 중고 수입시계를 판매하는 매장이 서울에서 손을 꼽을 정도였다"며 "몇몇 시계 마니아들이 서로 소량 거래를 하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입시계 시장 규모가 1조원 이상으로 불어난(2013년 10개 주요 수입시계 업체 매출 기준) 현재 서울시내에 중고 수입시계를 취급하는 매장은 100여곳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업계 전언이다.

온라인 오픈마켓과 시계 커뮤니티를 통한 중고 거래 시장도 대폭 커졌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50만원 안팎의 모델이 거래물량의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롤렉스도 매물로 심심찮게 올라온다. 수입시계 시장이 커지며 과거 '고가 예물시계'로 통한 롤렉스 물량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시장이 커지고 공급이 늘어났지만 중고 감가상각률은 다른 소비재에 비해 여전히 낮다. 백화점 판매가격이 1000만원 수준인 롤렉스의 인기모델 '서브마리너 116610LN'는 신동품의 경우 원 가격보다 약 12% 낮은 880만원 안팎에 거래된다. 신품 가격이 800만원대인 오메가 '드빌 아워비전'의 중고도 700만원대에 거래된다.

물량이 늘어난 1000만 원대 수입시계지만 중고시장을 이용하면 '시세 차익'을 남길 수도 있다. 자영업을 하는 40대 A씨는 해외에서 1000만원 안팎의 명품시계를 구매한 후 차고 다니다가 국내 중고시장에 판다. 열에 아홉은 '남는 장사'다. A씨는 "특히 최근에는 엔저에 따른 환율 덕을 톡톡히 본다"고 말했다.

수입 시계 시장의 급성장은 이전에 없던 1억원 안팎의 초고가 중고 시장도 만들어냈다. 신품 판매 자체가 드물었던 '위버 럭셔리'(일반 명품보다 더 비싼 최고급 명품) 브랜드 모델 판매가 늘어나면서 부터다. 파텍필립 공식 수입사 우림FMG 관계자는 "올해 1억원 이상 모델은 매장 당 매달 1개 이상씩 꾸준히 팔린다"고 말했다.

초고가 중고 시장은 '시계 재테크'의 핵심이다. 경우에 따라 '억' 대의 판매 차익을 남길 수도 있다. 신품 가격 9000만원 수준인 '파텍필립 월드타임 5131'의 중고 시세는 1억5000만원~2억원 대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브레게, 오데마피게, 바쉐론콘스탄틴 등 브랜드도 연간 수천개 정도 생산되는 경우 모델에 따라 중고 가격이 신품 가격보다 수천만원 뛴다. 한정판 모델의 경우는 부르는게 값이다.

초고가 중고 시계는 보통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거래된다. 명품 시계 콜렉터 B씨는 "가격이 높다 보니 믿을 만한 사람들 끼리 저녁 모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시계 거래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며 "모임 멤버가 시계 수집에 취미를 붙이려는 지인을 데려오는 식으로 '중고시장' 영역이 넓어 진다"고 말했다.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선더버드'/출처: RPR

중고 시계시장의 영역은 '빈티지(연대가 오래된) 시계'로도 확산되고 있다. 이와 관련, 불과 5년 전 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시계 경매'도 최근 신사동 갤러리에서 열리기 시작하고 있다. 1950년대 미국 공군 선더버드 곡예 비행단의 우수한 파일럿이 하사받은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선더버드'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고가의 빈티지 모델이 거래된다. '용정 컬렉션' 등 강북에 위치한 빈티지 시계 매장에는 여성 고객 방문이 최근 늘어날 만큼 고객 폭도 확대되는 추세다.

K옥션 관계자는 "2차 시장이 있으면 1차 시장인 시계 매장 판매는 더욱 탄력을 받게 마련"이라며 "믿을 만한 2차 시장이 자리를 잡게 되면 시계의 가치는 더욱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