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싸거나 비싸야 팔린다…중간이 사라진 연말 소비

#1. 대학 교직원인 이미진씨(29·가명)는 지난주 백화점에서 100만원이 넘는 프리미엄 패딩재킷을 현금을 주고 샀다. 평소 유니클로나 에잇세컨즈 같은 SPA(제조.유통 일괄화 의류) 매장이나 인터넷 쇼핑몰을 자주 찾던 그녀가 백화점 매장을 방문한 것은 2년만이다. 이씨는 "내년 봄 결혼을 앞두고 나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며 "6개월간 아낀 용돈으로 구입했다"고 말했다.

#2. 대기업에 다니는 박진호씨(37·가명)는 동료들에게 '괴짜 짠돌이'로 통한다. 그의 한 달 용돈은 20만원 남짓. 평일엔 하루 세끼를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며 술도 잘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여행이라면 펑펑(?) 돈을 쓴다. 국내 여행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며, 1년에 3∼4차례는 반드시 해외여행을 간다. 올 연말에도 그는 항공사 마일리지를 활용해 가족들과 괌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가격이 싸거나, 비싼 제품만 팔리는 이른바 소비 양극화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부분의 소비는 철저히 최소화하지만 취미나 자녀에게만은 지갑을 활짝 열거나, 디저트·네일아트 같은 소소한 사치를 즐기는 이른바 '원 포인트' 소비족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 같은 소비 행태가 확산되며 연말 대목을 맞아 가장 바빠야 할 유통가는 한산하기만하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는 매출이 신통치 않고 명동거리 상점이나 동대문·남대문 시장도 손님이 끊겨 썰렁한 모습이다.

◇싸거나 혹은 비싸거나…중간이 사라진 연말 소비=반면 요즘 손님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온.오프라인 할인 행사장이나 프리미엄 패딩, 명품 시계.가방 등 고가제품을 파는 매장으로 양분된다. 지난 12일 국내 온라인몰들이 진행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행사에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접속이 폭주한 게 단적인 예다.


일반 의류 매장은 썰렁하지만 한 벌에 100만원이 넘는 프리미엄 패딩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달 롯데, 현대, 신세계 백화점의 프리미엄 패딩 매출은 지난해보다 최대 3배까지 늘었다. 백화점 직원들 사이에선 "프리미엄 패딩이 백화점을 먹여 살린다"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다. 명품 가방과 시계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는 '원 포인트' 소비의 대표 주자다.

◇취미·자녀에만 지갑 여는 '가치소비'…나를 위한 '작은 사치'도=무작정 돈을 아끼기보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아이템을 찾아 소비하는 '스몰 럭셔리' 소비족도 올 연말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한 끼에 5000원짜리 밥을 먹고 디저트에는 2만원을 쓰거나, 옷이나 신발은 구입하지 않으면서 1주일에 한번은 꼭 네일숍을 찾는 사람들이 그렇다.

전자상가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민성식씨(44·가명)도 최근 3년간 새 옷을 산 적은 없지만 카메라라면 사족을 못 쓴다. 식사비를 아낀 돈으로 수 백 만원짜리 망원렌즈를 살 정도다.

차윤지씨(33·가명)는 딸 아이에게 올인하는 일명 '팸(Family의 줄임말)' 소비족이다. 딸을 일찌감치 영어유치원에 보냈고, 옷은 수입브랜드만 입힌다. 차 씨는 "이달 말 딸아이와 뉴질랜드 단기 연수를 다녀올 생각"이라며 "딸아이를 위한 지출이 큰 만큼 다른 쓸데없는 지출은 거의 최소화 한다"고 말했다.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장은 "일상에선 저렴한 것을 찾으면서 자신이 가치를 두는 특정 품목이나 서비스에는 큰 돈을 아끼지 않는 소비가 연말을 맞아 더 두드러지고 있다"며 "불황이 장기화할수록 과시적 소비보다는 특별한 수집이나 경험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소비가 확실히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손님 끊긴 유통가…백화점도, 전통상권도 '썰렁'=이런 달라진 소비 행태는 주요 백화점들의 겨울 정기세일 성적표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달 초까지 진행한 겨울 세일의 매출 신장률은 전년대비 1∼2%에 그친다. 갑작스런 한파로 겨울의류 매출이 반짝 오르긴 했지만 대세를 반전시키지 못했다.

A백화점 관계자는 "한파가 오지 않았다면 매출 타격은 더 심했을 것"이라며 "예년 12월에는 부모들이 수능시험을 본 자녀를 데리고 백화점에 많이 나왔는데 올해는 그런 손님들마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이색 소비가 유통업계 실적의 근간을 바꿀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대형마트가 10분기 연속 실적이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나 명동 상점가나 동대문·남대문 시장 등 전통 상권 매출이 흔들리는 것도 소비 불황과 이색 소비가 맞물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동대문시장의 한 의류매장 관계자는 "최근 5년간 동대문을 찾는 손님들이 해마다 줄고 있다"며 "손님들에게 가격이나 제품으로 호소할 수 있는 매장만이 살아남는 법칙이 생기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