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넛크래커?' 한국 고유의 '혼'으로 넘는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며 살아남았다. 수백차례 외부의 침략과 전쟁,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쳤지만, 한국의 '기'는 결코 꺾인 적이 없다. 오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포기할 줄 모르고 억척같이 달려왔다. 이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칠수록 한국인은 더욱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 왔다.

◇한반도, 지정학적 '완충지점'
이삼성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저서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에서 한반도를 '해양세력인 일본과 중국 사이에 가로놓인 바다 중간의 지정학적 완충지점'이라고 분석했다. 한반도는 육로로는 중국 요동과 일본을 연결해 주는 길이었고, 해로로는 중국 산동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간 기지였다.


임진왜란의 경우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표면적 이유는 명나라를 치고자 하니 조선이 길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00년 후 벌어진 청일전쟁에서도 일본은 한반도 서해안에서 청군을 물리친 다음에야 한반도를 전진기지 삼아 요동과 산동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이 교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 간 경제적 네트워크화는 16세기에 역동성을 띠게 된다. 중국 명나라 경제가 상업화되면서 중국이 은에 대해 거대한 수요를 갖게 됐고, 16세기 중엽 일본은 이와미 은광산을 개발하면서 동아시아에 강력한 은 공급자로 등장했다. 일본은 중국의 물산이 필요했고 중국 상인들은 일본의 은을 원했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있었다. 존 페어뱅크는 동아시아에서 다른 나라들이 중국과 같은 관계양식을 지역에 따라 △중화권 △내륙아시아권 △외부권 등 셋으로 나눴다.


일본은 때로는 중화권에 속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유럽 등과 함께 외부권으로 분류된다. 일본이 중화권에 속했을 때에도 그 배경은 군사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 가진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흡인력과 함께 무역에서 오는 물질적 이익 때문이었다는 분석이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질서에서 일본의 주변성은 오히려 일본에게 동, 서양의 전략적인 중간자, 그리고 동아시아의 선진세력으로 도약하는 지정학적 조건이 됐다.

중화권의 중심인 중국과 동아시아의 '경계인'적 존재였던 일본 사이에서 한반도는 '버퍼' 역할을 해야 했다. 그만큼 외풍 속에서 고단했던 역사였다.

◇'혼란'의 한반도
당시 조선은 '사농공상', '사대주의' 사상에 발목 잡혀 이렇다 할 경제, 사회적 발전을 하지 못했고 이는 후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故)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과거 역사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우리는 문화 수준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하다. 한국은 고도의 고유한 정신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경제력에서는 정신문명이 낮은 미개국과 별로 차이가 없을 정도로 취약하고 낙후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치우쳐 쇄국주의를 고집한 나머지, 신문명과 과학 및 기술의 도입을 등한시해 근대 국가에의 개화와 발전의 계기를 일실하고 말았다. 국내적으로는 그칠 줄 모르는 사색당쟁에만 골몰했던 관계로 국민의 이익을 등지는 무정부상태의 혼미를 거듭했다. 마침내 후반 50년에는 선진 강국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일본의 힘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회장은 정신적 재무장을 촉구했다. 그는 '우리의 반성'이란 글에서 "정신적 타락은 빈곤과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룬다"며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이든 빈곤이 깃들어 있는 한 사회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기적과 혼'
빈곤을 이겨내기 위한 한국인의 집념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이렇다 할 경제 기반이 없었지만 한국인의 '혼'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을 만들어 냈다.

1972년 3월23일 현대중공업 조선소 기공식을 위해 트럭과 중장비가 도열해 있다. /사진=현대중공업 홈페이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현대중공업 창립 일화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실화다. 정 회장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울산의 백사장에 초대형 조선소를 짓기로 결심했다. 당시 우리나라 조선업은 세계 시장점유율이 1%에도 못 미칠 정도로 영세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대형 조선소를 짓기 위한 경험이나 기술, 자금도 없었다.

정 회장은 조선소 부지로 점찍어 둔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 사진 한장과 지도 한 장, 그리고 유조선 도면 한 장을 가지고 세계를 돌았다. 그가 거북선이 나온 오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며 '영국보다 300년 앞서 우린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 산업화가 늦었지만 잠재력은 그대로'라는 말로 차관을 빌려 거대 조선소를 건립한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어록 가운데 '이봐 해봤어?'라는 말은 빈곤을 극복하고 대도약을 일군 한국인의 기업가정신을 압축해 보여준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 자동차 설계기술은 거의 백지상태였다.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구상에 "현재 조립하고 있는 차의 조립 도면조차 제대로 카피도 못하는 실력으로 무슨 소리냐"는 반발이 거셌다. 막상 고유모델을 개발하기로 방향을 정했지만 디자인 뿐 아니라 엔진, 변속기, 차체 등 관련 기술이 전혀 없었던 현대로서는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무에서 유'를 일궜던 한국인의 '혼'은 다시 빛을 발했다. 디자인 업체를 찾아 이탈리아로, 엔진과 변속기 기술을 위해 일본, 영국으로 무작정 날아갔다. 갖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현대는 전략을 세운 지 3년 만에 고유모델 '포니'를 생산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세계 자동차 역사에서 당시 한국 같은 후진국이 고유모델을 개발한 사례는 그 전까지 전무했다.

현대자동차 '포니' 발표회에 참석한 정주영 회장 /사진=현대그룹 홈페이지

불굴의 집념에 근면함까지 더해지면서 한국 경제는 이른바 '퀀텀 점프'를 시작했다. 기존의 관례 또는 관념들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전자의 기흥 반도체공장 제1라인은 1983년 9월12일 착공돼 1984년 3월 말 완공됐다. 첫 삽을 뜬 지 정확히 6개월 18일만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선진국 관례로는 18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하는데, 우리는 3분의 1로 단축시켰다"며 "하루도 빠지지 않은 공휴일 출근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로, 한국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앞서 그는 "우리는 너무나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무슨 비약적인 수단이나 방법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빈곤이나 산업구조의 낙후성을 극복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국가가 따라할 수 없는 '근면함'으로 승부를 걸었고, 세계는 한국을 주목하게 됐다.

◇한국 고유의 DNA
그동안 외국인들의 눈에 '성격 급한' 한국인들은 무엇이든 빨리 처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십여년 전까지만해도 해외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빨리빨리'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외국인들도 적잖았다. 이 같은 '스피드'는 경쟁에서 이기는 무기가 됐다. '365일 3교대'로 대표되는 한국의 '빨리빨리' 정신은 가전, 자동차, 반도체, 조선 등 각계의 신화를 만들었다.

한 전자업계 관계자는 "2000년대 초반만해도 삼성전자와 LG전자가 TV부문에서 일본의 소니(SONY)를 넘어설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변곡점에서 우리 기업들이 과감하고 민첩하게 움직인 결과, 우리 기업들이 세계 TV시장을 제패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피드도 중국과의 싸움에서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중국의 모방력, 흡수력, 추진력은 한국이 과거 미국과 일본을 따라하던 것보다 3~4배는 빠르다"며 "정보화의 효과와 뭐든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중국인의 강한 흡수력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전 소장은 "한국의 규모의 경제, 스피드의 경쟁력은 이제 한계"라며 "이젠 창의의 경제력를 무기로 삼고 감성과 촉으로 중국과 대결해야 승산이 있다"고 조언했다.

중국과 맞붙어 있으면서도 2000년간 독립성을 지킨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때 중국을 정복했던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모두 패망했지만 한국만은 굳건히 살아남았다.

중국인들도 한국인의 '특수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이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만의' 특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지한파 중국인들의 전언이다.

중국인들은 무엇이든 자신의 문화로 소화해 내려는 특성이 있다. 이 때문에 해외 유명 브랜드들도 중국에 들어가면 중국식 이름으로 바뀐다. 이런 중국인들이 '한류'와 '한국문화'에 열광하고 있다는 점은 아무리 해도 '베낄 수 없는' 한국인만의 DNA가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과거 IMF 외환위기로 우리 경제가 위험에 빠졌을 때 국민들은 나라 빚을 갚자며 너나 할 것 없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다른 나라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한국인만의 DNA는 한국 경제를 최근의 '신(新) 넛크래커'에서 탈출시킬 원동력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