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틸리케 감독, '한국형 늪 축구' 어떻게 만들었나

한국 수비수들 곽태휘(오른쪽)와 한국영(가운데), 김창수가 밀집 수비를 펼치고 있다. /사진 및 GIF=AFPBBNews, 경기 중계 영상 캡쳐, 편집

'1-0, 1-0, 1-0'.


3전 전승. 3득점 그리고 '무실점'. 지난 17일 호주 브리즈번 스타디움. 한국이 개최국 호주와 조별예선 최종전을 치렀다. 앞서 우리가 1골 차로 힘겹게 꺾었던 쿠웨이트와 오만을 4-1과 4-0으로 완파한 호주였다. 게다가 그들의 홈이었다. 전 세계 도박사들도 일제히 호주의 우세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의 무실점 승리. 교민들의 응원도 한몫했다. 그 밑바탕에는 슈틸리케호의 '한국형 늪 축구'가 있었다.

한국이 3연승으로 승점 9점을 획득하며 A조 1위로 8강에 올랐다. 앞서 한국은 오만을 1-0으로 제압한 뒤 쿠웨이트도 1-0으로 물리쳤다. 하지만 그 과정은 좋지 못했다. 빈곤한 득점력이 문제였다. 쿠웨이트전에서는 수비마저 크게 흔들렸다. 슈틸리케 감독은 쿠웨이트전을 마친 뒤 이례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우승 후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칫, 한국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는 발언이었다.

뒤이어 맞이한 호주와의 최종전. 한국이 달라졌다. 그리고 또 이겼다. 슈틸리케 감독은 호주전을 앞두고 기자회견에 임했다. 당시, 슈틸리케 감독은 '매 경기 수비진이 바뀌는 것'에 관한 취재진의 질문에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절치부심. 슈틸리케 감독은 수비에 더욱 만전을 기하고 나온 듯 보였다. 한국 주축 선수들이 부상(이청용)과 컨디션 난조(손흥민, 김주영) 등을 겪는 상황이었다. 어려웠고 힘들었다. 게다가 상대는 8득점 1실점의 호주. '창' 호주와 '방패' 한국의 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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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수비수 김영권(가운데)이 공을 빼앗은 뒤 줄 곳을 찾고 있다. /AFPBBNews=뉴스1

한국은 이날 김진수(左)-김영권-곽태휘-김창수(右)로 이어지는 수비진을 내세웠다. 그 앞에는 박주호와 기성용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섰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호주는 초반부터 한국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볼 점유율을 강조하는 슈틸리케 감독이다. 그러나 이날 볼을 많이 점유한 쪽은 오히려 호주였다. 67.2 대 32.8로 호주가 크게 앞섰다. 슈팅 수도 14(유효슈팅 6) 대 9(3). 총 패스에서도 515 대 255로 호주가 우세했다. 결국 한국은 경기 내내 자신의 진영에서 수비를 해내야 했다.

한국은 전반 31분 선제골을 뽑아냈다. 이정협이 이근호의 패스를 향해 넘어지면서 발을 툭 갖다 대 골로 연결했다. 이후 동점골을 노린 호주의 공세가 더욱 거세졌다. 특히, 후반 25분에는 팀 케이힐과 크루즈가 동시에 교체 투입됐다. 유리치와 렉키까지 호주 최고의 공격진이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한국에는'늪 축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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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슈틸리케 감독은 '2014 대한축구협회(KFA) 기술 컨퍼런스'에서 본인의 수비 철학을 설명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공이 없는 상황에서, 상대 선수와 우리 수비수의 간격을 강조했다. 당연하게도 그 간격은 더 좁을 수록 좋다. 즉, 공이 상대 선수 발에 오기 전에 미리 좀 더 가까이 접근한 채 압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슈틸리케 감독은 4.83m등으로 'cm' 단위까지 접근 거리를 계산해 선수들에게 강조했다.

이날 한국 최종 수비 라인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철저한 대인마크를 펼쳤다. 특히, 공이 없는 상황에서도 상대 선수를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찰거머리 같은 대인 방어였다. 좀처럼 상대 공격수와의 거리를 떨어트리지 않았다. 곽태휘와 김영권이 그 중심에 섰다. 그러는 사이, 기성용과 박주호, 후반엔 장현수가 수비에 가담해 공격의 줄기를 차단했다. '상대 선수가 패스를 받기 전에 미리 가까이 붙어 괴롭히는 것' 슈틸리케 감독 늪 수비의 첫 번째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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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철저한 대인 방어가 펼쳐졌지만 밖에서는 달랐다. 중원 진영이 그랬다. 오히려 상대 미드필더를 너무 놔두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점은 뚜렷했다. 바로 우리 미드필더와 수비진의 간격이 조밀해진다는 것이었다. 약 35m 거리를 기점으로 기성용과 박주호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서 상대가 패스 또는 침투를 시도할 경우, 완벽하게 둘러싸며 상대의 범실을 유도했다. 우리의 '늪 공간'으로 들어온 사커루들. 그들은 한국 2~3명의 압박에 둘러싸인 채 무기력하게 공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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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경기에서 대부분의 골은 골대 중앙을 기점으로 45도 지점 안팎에서 터진다. 반면 측면은 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골을 넣기 힘들다. 따라서 측면에서는 1차적으로 크로스를 올려야 한다. 수비로서는 한 숨 돌릴 기회가 있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은 중앙 지역이 수차례 뚫리며 실점을 허용했다. 반면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 코스타리카 등 수비가 강한 팀은 중앙 지역에서 쉽게 실점을 내주지 않았다.

이날 호주전에서 한국은 중앙 수비벽을 더욱 두텁게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차적으로 중원에서 돌파를 당할 경우, 측면을 아예 버린 채 풀백들이 중앙으로 들어와 밀집 방어망을 펼쳤다. 김창수와 김진수가 영리하게 이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김창수는 수시로 중앙 수비수 위치까지 들어와 대인 경합을 벌였다. 김창수가 들어온 공백은 한국영 또는 측면 공격수들이 내려와 메웠다. 중앙 지역에 한국 선수들이 밀집한 곳은 호주 선수들에게 있어 '늪'이나 다름없었다.

한국 대표팀 골키퍼 김진현(왼쪽)이 팀 케이힐을 앞에 둔 채 펀칭을 시도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그리고 이 모든 '늪 수비'가 뚫리더라도, 최종 라인에는 '거미손' 김진현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특히, 후반 43분이 압권이었다. 김진현이 크루스와의 완벽한 1대1 위기를 막아내며 수퍼 세이브를 펼친 것이다. 이어 후반 추가시간 7분이 지났고, 한국의 1-0 승리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선수들은 많이 지쳤던 듯, 그라운드 위에 털썩 꿇거나 드러누운 채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10월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데뷔전을 앞두고 "공격을 잘하는 팀은 승리를 할 수 있지만, 수비를 잘하는 팀은 우승을 차지한다"는 미국프로농구(NBA)의 격언을 소개한 바 있다. '수비를 잘하는 팀이 우승을 차지한다…'. 또 어떤 팀이 '늪'에 빠질까. '한국형 늪 축구'를 만들고 있는 슈틸리케 감독이 55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한국에 안길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