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혁신성' 순위에 "말만 혁신성, 내용은 기술금융"

금융위원회가 28일 은행들의 '혁신성' 순위를 발표한 가운데 은행권에선 성적이 나쁜 곳을 중심으로 불편한 표정이다. 보수적 대출 관행을 개선해 중소기업 지원을 강화하라는 등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영업 특성과 성격이 조금씩 다른 은행들을 줄 세우기 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응이 많다.

금융위에 따르면, 혁신성 평가의 지표는 기술금융이 40점, 보수적 금융관행개선이 50점, 사회적 책임이행이 10점으로 구성됐다. 평가 결과 일반은행 부문에선 신한은행이, 지방은행 부문에선 부산은행이 각각 1위였다.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은 공공 부문 지원이 목적인 특수은행이라는 점을 감안해 공개하지 않았다.


은행들은 이번 평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내놓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속내는 '벙어리 냉가슴'이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술금융의 배점이 40점인데다 50점을 차지하는 보수적 관행 개선 내용의 상당 부분도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라는 것"이라며 "은행마다 기술금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순위를 메겨 '누구는 잘했고, 누구는 잘못했다'고 따지는 건 다소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도 "기술금융 평가 순위라면 몰라도 혁신성이라는 추상적인 이름 자체가 문제. 마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은행처럼 보이지 않겠나"라며 "정부 차원에서 기술금융을 독려하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이런 방식은 민간 금융사의 경영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순위가 높은 은행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관계자는 "올해는 첫 평가였기 부담이 그나마 덜했지만, 다음에는 '높은 순위를 지켜야 한다'며 기술금융에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며 "중소기업에 대한 보수적 대출 관행은 그것대로 개선해야 겠지만, 부실 사고시 건전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임직원의 평가·보상 체계에 기술금융을 비롯한 혁신성 평가를 반영토록 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불만이 적지 않다. 은행연합회는 이날 △혁신성 결과에 따라 CEO 성과급을 최대 12% 감면하고 △직원 성과평가지표(KPI)에 3% 내외의 기술금융 항목을 반영하는 등의 개선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형식만 사원은행의 의견을 종합한 '자발적' 개선책일 뿐 "금융당국의 지시와 마찬가지"라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영업점 직원은 "KPI는 은행원의 고과와 승진·보수를 모두 결정하는 지표"라며 "영업점의 입지나 성격에 따라 고객층이 다르기 마련인데, 일률적으로 기술금융 배점을 넣으면 아파트 단지 내 지점 직원이 공단까지 출장 영업이라도 가라는 말이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시중은행 중 7·8위로 꼴찌를 기록한 한국씨티은행과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 등 외국계은행의 충격은 더 크다. 일단 정부가 의지를 갖고 발표한 만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다. 한 외국계은행 고위관계자는 "그동안 기술금융 분야가 미흡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금융의 기본적인 개념과 방식을 정하는 작업도 필요했다"며 "지적당한 부분에 대해서는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술금융과 같은 국내 정책목표보다는 본사의 수익성 지표에 더 민감한 외국계 은행들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른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기술금융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전담인력 등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모로 부담"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