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임금 광종의 미친 숙청

역사에 ‘만약’은 있다. 역사기록은 징검다리와 같다. 역사적 실체를 향해 띄엄띄엄 다리를 놓아줄 뿐,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법이 없다. 그 돌과 돌 사이의 간격을 촘촘히 채워주는 것이 바로 ‘만약’이라는 상상력이다.


현재 방영 중인 사극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그런 의미에서 꽤 흥미롭다. 이 드라마는 제목부터 한 역사인물을 가리키고 있다. ‘빛날 광(光)’을 묘호로 삼은 고려 4대 황제 광종(光宗)이다. 그는 26년의 재위기간(949~975년) 동안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에 대한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를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르는 바람에 ‘미칠 광(狂)’을 붙여 광종(狂宗)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광종의 본명이 바로 극중 저주받은 황자로 나오는 왕소이다.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그러나 역사인물을 캐릭터로 쓸 뿐 스토리는 실제 사건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역사기록이 풍부한 조선과 달리 고려, 그것도 개국 초기는 사료가 빈곤하다. ‘만약’으로 채워야 할 여지가 크다. 이 드라마가 그런 케이스다. 단, 창작 비중이 큰 사극이라도 캐릭터에 몰입하는 재미를 느끼려면 시대배경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경우 왜 광종이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는지 물어야 한다. 그 단서가 드라마에서 통째로 들어낸 2대 황제 혜종의 죽음과 왕규의 난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삼한을 통일하기 위해 각지의 호족들과 혼인동맹을 맺었다. 덕분에 그는 29명의 부인에게서 25남 9녀를 뒀다. 왕건의 사후 권력투쟁이 치열했던 건 그래서다. 2대 황제 혜종의 어머니는 태조의 둘째부인 장화황후 오씨였다. 그는 큰아들이었지만 나주를 기반으로 한 외가의 힘이 미약했다.

하지만 왕건은 통일전쟁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운 큰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줬다. 대신 광주 호족 왕규의 딸(후광주원부인)을 배필로 맺어주고 개국공신 박술희로 하여금 보좌하게 했다. 왕규는 당시 한강 일대를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호족이었고, 박술희는 태조를 도와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장이었다. 태조는 이들이 각각 정치적, 군사적 파트너가 돼준다면 다른 형제들이 혜종을 흔들지 못할 것으로 봤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고려사’에 따르면 혜종의 장인 왕규는 사위를 암살하려 한 반역자로 나온다. 사극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는 왕건의 사촌동생 왕식렴이 태조의 침실에 자객을 들여보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반면 ‘고려사’는 이 사건이 혜종 때 일어났으며 주모자는 왕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혜종에게 배다른 형제 왕요(3대 황제 정종)의 역모를 고변했는데 한편으로는 황제에게 자객을 보냈다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혜종이 재위 2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곧이어 정종이 즉위한 것을 보면 이는 승자의 역사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혜종을 지키려 한 왕규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왕요와 왕소는 태조의 셋째 부인 신명순성황후 유씨의 소생이며 혜종의 강력한 경쟁자들이었다. 이들의 외가는 충주의 대호족으로 혜종을 압도했다. 특히 정종의 장인은 승주 호족 박영규(견훤의 사위)였고, 후견인은 서경을 개척한 개국공신 왕식렴이었다. 혜종 못지않은 정치적, 군사적 파트너를 둔 셈이다. 결국 정종은 혜종 일파를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정종 역시 수많은 황자들을 내세워 권력을 잡으려는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로 인해 피를 말리다가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답은 나왔다. 광종이 대숙청을 단행한 까닭은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었다.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등 광종의 개혁정책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을 제압하는 방안이었다. 고려에서 노비는 재산이자 무기였다. 노비안검법에는 억울한 노비들을 풀어줌으로써 세력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광종의 의도가 숨어있었다. 과거제도도 다르지 않았다. 황제는 과거시험으로 똑똑한 인재들을 등용해 호족과 공신들을 견제하도록 했다. 그 혜택을 본 신라 육두품 출신 문관들은 광종 사후에 조정을 장악하며 문벌귀족의 시대를 연다.

*권경률 칼럼니스트 개인 홈페이지(www.rainbowtab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