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가장 잔인한 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사람이 죽어가는 초토에서 라일락 향기를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뒤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워냈으니


T.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의 시작 부분이다.

엘리엇은 4월을 정말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생각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는 습관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엘리엇이 지적한대로 4월은 꽃이 피는 봄인데도 잔인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의 오류일 수도 있다.

이번 주에도 여전히 각종 꽃들이 만개하고 있다. 거기에 과하지 않은 봄비가 연이어 내려 마음이 풋풋하기 그지없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투명한 빗방울을 보며 세상을 다시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 죽은 땅에서 라일락 향기를 키워내듯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얼마나 슬픈 일들이 많으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러시아에도 어김없이 봄이 온다. 다시는 세상에 꽃이 필 것 같지 않은 긴 겨울도 봄이 오는 소리에 슬며시 밀려 나간다.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은 수선화다. 노란색과 흰색의 수선화가 농부들의 텃밭인 시커먼 땅에서 말 그대로 아주 수줍어하며 부끄러운지 약간 고개를 외로 돌리고 고개를 내민다. 그 때가 4월 쯤이다. 날씨는 아직도 쌀쌀하고 쌩쌩한데 삐죽이 고개를 내민 자그마한 수선화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볼 때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바람을 잘 이겨내며 버티고 있다.


그렇게 되면 시장이나 길거리에 머플러를 두른 뚱뚱한 할머니들이 수선화를 가지고 팔러 나온다. 많이 가지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 바구니에 담아서 적당하게 가지고 나오면 금세 동이 나버린다. 러시아 사람들은 의외로 꽃 문화가 있을 정도로 꽃을 사랑하고 좋아한다. 한 겨울에 싱싱한 꽃들이 얼마나 비싼지, 그리고 대부분의 꽃들을 수입하니까 비쌀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남의 집에 갈 때 꼭 꽃을 사들고 갈 정도로 꽃 문화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이 된 나라다. 학교 입학식 때도, 시험을 보고도, 졸업식을 할 때도 꽃은 필수다. 이러니 봄이 오자마자 자기네 텃밭에서 나오는 수선화는 반갑고 정겨울 것이다.

필자도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수선화를 보았을 때 신선한 충격이었다. 거대한 나라와 거대한 몸짓의 사람들 사이에서 손바닥만한 가련한 수선화는 아주 청초하게 보여 가슴이 울컥할 정도였다. 수선화는 노랑과 흰색의 색상이 티 없이 고왔고 예뻤다.

러시아에서는 꽃을 살 때 불문율이 있다. 장례식장을 가거나 묘지에 갈 때는 짝수의 꽃을 산다. 망자에 대해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고 꼭 짝수의 꽃을 바친다. 그걸 제외하고는 모두 홀수의 꽃을 산다. 그러니까 꽃을 살 때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학교 선생님 댁에 처음으로 놀러갔을 때 짝수의 꽃을 사가지고 갔다. 그 때 선생님이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낯이 뜨거웠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그 후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나왔을 때 초기에는 꽃을 살 일이 있으면 잠깐 머릿속으로 홀수를 사야 되나 짝수를 사야 되나 하는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의 꽃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필자의 한 지인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지인은 야외에 넓은 땅에 별장을 짓고 살았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각양각색의 꽃이 만발한다고 했다. 그 분이 워낙 꽃을 좋아해서 정원이 다 차도록 꽃을 키웠다고 했다.

그런데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꽃이 필요할 때면 거의 무단으로 그 분 정원에 들어가 손으로 꽃을 꺾어간다고 했다. 꽃값이 비싸고 시골이라 꽃도 많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꽃씨를 사서 키우는 것도 보통의 경제력으로는 힘든 일이니 꽃이 많은 집을 보니 마치 자기네 집에서 꽃을 가져가듯 그렇게 꺾어갔다고 한다. 그 분은 꽃을 가져가는 것보다 함부로 꺾어가는 것에 더 마음이 아파서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즉 대문에 아예 면도칼을 꽂아두고 그 옆에 꽃이 필요하면 꺾지 말고 면도날로 깨끗하게 절단해서 가져가라는 팻말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미안했던지 꽃이 필요하면 그 분한테 이야기를 하고 면도날로 잘 베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러시아에 지금 쯤 샛노랑의 수선화와 순백의 수선화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며 여러 색깔의 선명한 튤립도 곧 선을 보일 것이다. 수선화와 튤립은 러시아에 봄이 왔다는 전령사의 신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