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 제품은 'NO'…먹거리 둘러싼 자존심 대결 '후끈'

#제과업체 직원 A씨는 최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때문에 진땀을 뺐다. 아이가 반 친구들 사이에 인기 있는 사탕을 사 달라고 조르는 탓에 '안 된다'며 한바탕 소동을 벌인 것. A씨 자녀가 요구한 사탕은 경쟁사 제품. 자신이 몸담은 업체에서는 생산하지 않아 비슷한 제품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A씨는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탓에 결국 편의점에 가서 사주기는 했지만 누가 볼세라 꽁꽁 숨겨 집에 가져온 뒤 숨어서 먹게 했다"며 "회사에서 '먹지 말라'고 강요한 것도 없는데 머릿속에 가득 찬 애사심 때문에 경쟁사 제품은 가족들이 먹는 것도 꺼리게 된다"고 말했다.


#롯데그룹 직원 대다수는 '카스'와 '하이트'를 쳐다보지 않는다. 술자리 공식 맥주는 '클라우드'다. 롯데그룹이 지난해 4월 맥주사업에 뛰어들면서 클라우드를 내놓자 직원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롯데가 만든 맥주'를 찾는다. 지인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오비맥주, 하이트진로 직원들도 롯데와 다를 바 없다. 경쟁업체 주류를 '입에 넣는 것'은 금물이다. 회사원 B씨는 "각기 다른 주류업체에 다니는 친구들이 있는데 만날 때마다 어떤 술을 주문해야할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며 "업체 간 경쟁심에 혀를 내둘렀다"고 말했다.

먹거리를 둘러싼 라이벌 사이의 '자존심 대결'이 치열하다. 경쟁사 제품에 대한 '본능적 거절' 일상화는 물론 가족들까지 애사심을 발휘한다. 특히 식음료와 주류, 유통 등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기업체 직원일수록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각에서는 '애국·애사심'을 '생활'과 동일시하는 한국인 특유의 기질이 구체화된 것으로 파악했다.

유통업계 양강으로 불리는 롯데, 신세계그룹의 기 싸움은 재계에 정평이 나 있다. 임직원 상당수가 가까운 경쟁사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보다 먼 거리라도 그룹이 운영하는 매장을 찾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신세계그룹 임직원은 '먹거리'에서는 롯데와 맞붙을 일이 크게 없었지만 롯데주류가 클라우드를 내놓으면서 '클라우드를 제외한 맥주'라는 주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주류업체는 영업직원이 아니더라도 식당에 가면 냉장고부터 살핀다. 자사 술이 없을 경우 식당을 나가기 일쑤다. 한 주류업체 임원은 최근 상을 당한 지인의 빈소 냉장고에 자사의 소주와 맥주가 보이지 않자 밖으로 나가 몇 박스씩 구매한 뒤 조용히 냉장고에 술을 채워 넣었다. 빈소를 찾은 C씨는 "영업 담당 임원도 아니었지만 자사의 주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돈을 주고 술을 사와서 채워 넣는 모습이 놀라웠다"며 "주류업체의 경쟁심과 애사심이 유별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 나왔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식품기업 직원들 역시 경쟁사 제품 사용을 꺼린다. 오리온은 음료수를 제조하지는 않지만 롯데와 농심 등 주력 경쟁사에서 생산하는 음료수는 찾지 않는다. 야쿠르트와 오뚜기 임직원도 경쟁사인 농심 라면을 먹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한국인 특유의 문화로 분석했다. 근대화를 거치며 숨 가쁘게 달려오던 시절에 '회사=나'라는 동질감이 극대화되면서 발현된 것이라는 것. 업계 관계자는 "경쟁사 매출에 보탬이 되는 행위로 몸담은 회사에 해가 되지 않겠다는 의식이 뼛속까지 박혀 있다"며 "개인보다 회사 등 집단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성향이 이 같은 반응에도 나타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