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유찜·밥곽·꽝포'…국어책 밑줄 긋고 다른 글 적는 아이들

최재영 제일기획 GCSC 센터장

"닭유찜(치킨), 밥곽(도시락), 꽝포(거짓말)…. 우리가 예전 영어공부할 때 교과서에 밑줄 긋고 '아이 엠 어 보이' 이렇게 한글로 써서 읽었잖아요. 탈북 청소년들이 지금 그래요. 영어가 아닌 국어 교과서에 밑줄 긋고 북한말로 뜻을 적어요."


남북한어 번역앱(애플리케이션) '글동무'를 출시한 제일기획의 최재영(51·사진) 굿컴퍼니솔루션센터(GCSC) 센터장은 "같은 민족이라고 다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라며 남북분단 70년 동안 언어 장벽이 그만큼 높아졌다고 강조했다.

'글동무'는 제일기획이 드림터치포올(교육전문 NGO),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과 함께 탈북 학생들의 언어 정착을 돕고자 개발한 남북한 단어 자동 변환 앱. 고교 국어교과서 3종 추출 단어와 생활어 등 약 3600개 단어의 변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디지털사전으로 지난달 출시됐다.

앱 개발을 총괄한 최 센터장은 27년간 광고업계에서 PD, AE를 거쳐 최근에는 다양한 공유가치창출 캠페인을 진행해오고 있다. 그는 "탈북 학생 교육을 주제로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인터뷰를 하다가 뜻밖에도 그들이 말은 대부분 알아듣는데 글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발견했다"며 "우리회사가 소통,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집단인데 도움을 줘야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탈북민들의 남한 정착 문제는 사회적으로 관심이 많지만 최 센터장은 특히 학업을 하는 탈북 청소년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주목했다. 수업시간에 교사의 설명이나 친구들 대화 정도는 눈치껏 짐작하지만 정작 교과서를 보면 막막해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탈북학생들은 국어책에 나온 말의 50% 이상을 모른다"며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교육과 학업성취도 격차로 이어지고 결국 취업 등 사회진출에서 공평한 기회를 상실한다"고 우려했다.

'글동무'를 기획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편의성. 이를 위해 광학판독기술(OCR)을 적용해 앱에다 바코드를 찍듯 단어를 비추면 이에 맞는 북한 단어와 뜻풀이가 나오도록 했다.

실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개발과정에 탈북민 출신 대학생이 참여했고, 2차 감수는 북한에서 교사 등 경력이 있는 전문위원들이 맡았다. 남북한어 사전이 있지만 요즘 한국 청소년들이 쓰는 말이나 유행어가 워낙 빠르게 변해 기존 자료만으로는 한계가 컸기 때문이다. 제일기획 GCSC 직원 10여명 외에도 카피라이터, 아트디렉터 등 타부서 임직원들이 재능기부 형태로 앱 개발에 참여했다.

6개월 앱 개발기간 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은 진정성을 담는 작업. 최 센터장은 "북한, 언어와 관련돼 있어서 이번작업을 이념적 시각에서 보는 경우도 있었고, 탈북민들이 남한 정착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던 터라 그들과 어떻게 교감할지 매우 조심스러웠다"며 "결국 현장을 찾아 그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하는 데서 해답을 찾았다"고 말했다.

앱 출시 이후 "좋은 일을 했다"며 주변의 격려가 쏟아졌다. 최 센터장은 "일반인 대상의 앱이 아니지만, 이런 남북언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 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제일기획은 '글동무' 확산을 위해 탈북 학생들 대상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향후 교과서 외에 신문, 간판 등에 자주 나오는 표현들도 번역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최 센터장은 "'글동무'라는 이름처럼 이 앱이 단순 언어 번역 뿐 아니라 탈북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생활 커뮤니티, 소통 창구로 활용되길 바란다"며 "그게 바로 한국 내 작은 통일의 시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