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때문에" vs "엔저 덕분에"…엔저 장기화가 불러온 변화

머니투데이

송지유 기자
민동훈 기자

이달 초 친구들과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 첸진진씨(31)는 '설화수', '라네즈', '네이처리퍼블릭' 등 한국산 화장품을 잔뜩 샀다. 백화점과 명동 일대를 돌며 한국에서 유행하는 옷들도 구입했다. 하지만 고가 명품백과 시계, 수입화장품 등은 쇼핑목록에서 빠져 있었다. 2∼3년 전 한국에 처음 여행 왔을 때 명품백을 싹쓸이했던 쇼핑 스타일이 달라진 것은 다름 아닌 엔저 때문이다.

그는 7월 여름 휴가때 일본을 찾아 명품 쇼핑을 즐길 계획이다. 첸씨는 "엔화 가치가 떨어져 한국보다 일본에서 명품을 사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며 "명품 핸드백은 20∼30% 가격 차이도 적지 않은 금액이어서 구입을 미뤘다"고 말했다.

이처럼 '엔저 현상(엔화가치 약세)'이 장기화하면서 곳곳에서 후폭풍이 일고 있다.

2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급감했고, 중국인 관광객(유커)까지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고가제품 구입에 나섰다. 전복·파프리카 등 품질이 좋은 상품을 골라 일본으로 수출하던 농어민들은 수출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일본 상품 직구(직접구매)족들은 쇼핑할 맛이 난다. 국내 판매가의 30∼50% 수준의 싼 가격에 원하는 제품을 구입할 수 있어서다. 그동안 가격 경쟁력이 없어서 들여오지 못했던 일본 제품의 한국시장 상륙도 잇따르고 있다.

◇고가 수입품 가격역전, 비싼 명품백은 日서 산다=100엔당 원화 값은2011년 1500원대에서 2012년 1200원대로 급락한 이후 약세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000원이 붕괴됐고 올 들어서는 800원대를 넘나드는 초엔저가 지속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다.

엔화 약세로 유럽과 미국 등에서 수입하는 고가제품 가격이 한국보다 일본이 싼 가격역전 현상이 벌어지면서 국내 백화점의 유커 1인당 객단가(구매액)가 줄고 있다. 올 들어 5월 현재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의 유커 매출은 전년 동기대비 60% 증가했지만 1인당 객단가는 약 58만원으로 11% 감소했다. 1인당 90만원을 지출했던 2013년과 비교하면 36% 줄었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명품관) 매장 직원은 "중국인 고객수가 지난해보다 10∼20% 줄었고 제품 여러 개를 동시에 구매하는 고객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귀띔했다.

일본으로 여행가는 내국인들도 인터넷으로 가격을 비교한 후 현지 구입을 계획하는 사례가 많다. 국내 면세점에서 9만800원(83달러)인 '불가리 BLV 옴므'(100ml) 향수가 일본 면세점에서는 42.3% 싼 5만2300원(9200엔)에 팔린다. 에스티로더 퍼섹셔니스트 링클세럼의 경우 한국(23만9600원)보다 일본(16만1600원)이 32.6% 싸다.

◇광어·전복 수출 '뚝'…파프리카 농가도 울상=전복, 참치, 광어, 소라 등 품질이 좋은 상품을 일본으로 수출하던 어민들은 울상이다. 환율 쇼크로 '대일본 수출물량 감소→국내 유통물량 증가→가격 하락'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관세청에 따르면 2010년 대일 수출물량이 4000t에 달하던 광어의 경우 지난해 2800t으로 줄었다. 올(1∼4월)들어서도 수출량이 19.4% 감소했다. 4월 현재 백합(조개)과 김의 일본 수출 물량 역시 38.5%,17% 감소했다. 참소라의 대일본 수출량은 2012년 1800t에서 지난해 1250톤으로 30% 급감했다.

전남 완도 특산물인 활전복은 매년 연간 생산량(7100t)의 20%가 일본으로 보내지만 올해는 1분기 현재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내 유통물량이 늘어 가격도 올초 대비 21% 떨어졌다.

국내 생산량의 99%를 일본으로 수출하던 파프리카 농가도 직격탄을 맞았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환율 때문에 수출량을 늘릴수록 농민이 손해를 보는 구조"라며 "농자재 값이나 인건비는 오르는데 수출시세가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과자부터 샴푸까지…日 직구족 신났다=일본상품 직구시장은 호황이다. 국내 최대 해외 배송 대행 서비스 몰테일에 따르면 4월 현재 일본 상품 배송대행건수는 3만7000건으로 76%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배송대행건수가 15% 증가한 것에 비하면 두드러진 성장세다.

인기 상품은 △시아와세버터칩 12봉 세트 △손바유 마유크림 △로이스 생초콜릿 4종세트 △요괴워치 △무코타 헤어프로페셔널 3종 등이다. 이들 제품의 직구가격은 국내 판매가보다 50∼70% 싸다.

백화점 업계 최초로 일본 구두브랜드도 상륙했다. 신세계백화점은 그동안 제품 원가와 환율이 높아 들여오지 못했던 이세탄백화점의 자체슈즈브랜드 '넘버21'을 직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신세계 관계자는 "엔저 덕분에 인기브랜드 제품보다 20∼30% 저렴한 가격에 일본 구두를 선보이게 됐다"며 "당초 목표 대비 150∼200% 많은 매출을 올려 다른 일본 브랜드를 추가로 들여오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