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 이승철, '그리움의 사운드'에 몰입하다

가수 이승철이 12집 음악감상회에서 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승철은 새 음반에서 모든 곡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사진제공=진엔원뮤직웍스

가수 이승철이 26일 발표하는 12집 ‘시간 참 빠르다’는 요즘 시대 필요법칙인 ‘피처링’도 넣지 않았고, 또렷이 각인되는 ‘후크’(중심 멜로디) 중심의 노래도 삽입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록곡 가운데 한 두 개쯤 보이던 애상 젖은 곡들이 하나도 없다.


그는 어떤 의미에선 ‘대중성’ 법칙에 거리 한 뼘 둔 듯 자기 소리에 집중했고, 누가 더 많이 알아주느냐보다 자신이 더 만족할 수 있느냐에 매달렸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아 내놓은 새 음반은 이승철이라는 가수가 걸어온 길의 연장선상이라기보다 걸어갈 길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더 강조된 작품으로 여길 법하다.

그간 간간이 프로듀싱에 참여했던 그는 새 음반 모든 곡의 프로듀싱을 맡았고, 스티브 핫지·토니 마세라티 등 그래미 수상 경력을 가진 베테랑 믹싱 엔지니어를 동원해 소리 자체에 신경 썼다. 이 소리를 위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1억2000만원에 구입한 뒤 “앞으로 라면만 먹고 살아야할지 모른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디자인앤오디오에서 열린 12집 음감회에서 들어본 그의 수록곡들은 톡 쏘는 맛은 없지만, 소장하고 싶은 멋이 촘촘히 배어있었다.


그 맛의 시작과 끝은 역시 보컬에서 나왔다. 비애감이나 애상감의 물기를 뺀 자리에는 그리움이 수북이 쌓였다. CCM(현대기독교음악) 장르를 새로 편곡한 첫 곡 ‘시련이 와도’부터 마지막곡 ‘그리움만 쌓이네’까지 어느 한 곡에서도 지나치지 못할 그리움의 정서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조금만 꺾으면 슬픔으로 가는 경계에서 그는 멈췄고, 힘차게 차고 올라가는 고음의 순간에도 절제로 숨죽였다. 툭 털 듯 내 던지고, 젖지 않고 마른 목소리로 후렴을 탁성으로 도배하는 솜씨는 이승철 보컬의 새로운 단면을 보는 듯했다. 이 정서를 생각하면 ‘시간 참 빠르다’보다 ‘그리움만 쌓이네’가 음반명으로 더 적합해 보이기도 했다. 이승철은 애잔함이 거세됐다는 기자의 평가에 “원하는 지적”이라고 했다.

“매번 제 목소리로 들려주는 노래는 일정한 패턴과 정서가 존재하잖아요. 그렇게 똑같은 창법으로 지난 음반을 되새김질하긴 싫었어요. 그래서 애절함을 죽이고 그리움을 소구하는 창법과 필이 필요했는지도 몰라요. 그러기위해 왼쪽 귀엔 ‘가이드 보컬’(작곡가의 의도가 반영된 곡의 느낌을 소화하는 사전 도우미 보컬)의 목소리를, 오른쪽 귀엔 제 목소리를 들으며 녹음했어요. 자칫 전의 제 목소리가 다시 반복될까 봐서요. 작곡가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이승철 아닌 이승철의 소리를 담으려고 전념한 셈이죠.”

새 음반에 몰려든 곡은 200개가 넘었다. 그중 추려낸 곡들이 대부분 발라드였는데, 신사동호랭이(작곡)나 4번타자(작사) 같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창작자들도 눈에 띄었다.

타이틀곡 ‘시간 참 빠르다’은 아이돌 댄스 음악에 재주가 있는 4번타자와 신사동호랭이의 작품. 이승철이라는 가수의 특징을 고려해 작곡가는 느린 정박자의 발라드로 곡을 건넸지만, 이승철은 좀 더 리드미컬하고 빠른 비트의 음악으로 다시 편곡했다.

이 곡을 포함한 몇몇 곡들이 이승철의 편곡으로 심심함을 벗었다. ‘사랑한다구요’나 ‘비 오는 거리에서’는 설탕없이 자꾸 손이가는 과자처럼 듣는 맛의 중독성이 은근히 배어있다. 특히 드라마 ‘프로듀사’ OST곡인 ‘달링’의 피아노 버전과 록 버전, 기타 한 대로 꾸린 ‘사랑한다구요’의 어쿠스틱 버전은 서비스 곡 이상의 기대를 안겨준다.

가수 이승철은 12집에 대해 "왼쪽 귀는 가이드 보컬 소리를, 오른쪽 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녹음했다"며 "전작의 이승철 목소리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사진제공=진엔원뮤직웍스

이승철은 매번 정규 음반을 묵묵히 내왔으나, 이번 음반을 계기로 계속 낼지 말지를 고민중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흐름을 고려하면 정규 음반은 너무 소모적인 것 같다”며 “앞으로 3개월에 한 번씩 싱글로 가는 시즈닝 음반을 낼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30년의 음악생활은 그에게 ‘행복’의 연속이었다. 이승철은 “올해 50세인데, 한 번도 이 나이까지 노래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면서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최근 한 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 30년 후 모습으로 솔로 데뷔곡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를 부르고 나서 그는 울컥하며 눈물이 났다고 했다.

“분장을 하고나니, 가장 아쉬운게 ‘시간’이었어요. 갑자기 (신)해철이 생각도 나고,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도 나고 그랬어요. 30년 후면 80세인데, 그때 제가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턱시도 입고 노래할 수 있을까 그려보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의 30주년 기념 콘서트는 6월부터 미국 LA, 애틀랜타, 뉴욕, 중국 상하이, 캐나다 밴쿠버 등 월드투어로 시작한 뒤 9월 5일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국내 투어의 문을 열어 내년까지 이어간다.

이 규모를 보니, 30년 후 턱시도 단 80세 보컬리스트라는 그의 ‘희망’이 꿈으로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지난 30년을 그렇게 좋은 음악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왔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