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이 찾아왔을 때, 지식 완성의 꿈이 다시 꿈틀거렸다"

25년 만에 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 6권을 완성한 소설가 복거일. 한평생 '지식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제공=문학과지성사

소설가 복거일(69)은 간암이라는 인생 최고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지식을 삶의 본질로 인식하는 작가에게 병마는 지식의 완성을 도울 하나의 경고등인 셈이었다.


1991년 ‘역사 속의 나그네’(문학과지성사) 3권의 출간을 끝으로 25년을 쉬었던 그는 2012년 말기 간암 판정을 받자마자 나머지 3권의 집필에 몰두했고, 지난 1일 6권의 책을 마무리했다.

나머지 3권을 쓰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내일 죽는다고 하면 오늘 정신이 바짝 든다고 하는데, 병을 얻는 순간 글이 잘 써졌다”고 했다.

“3권을 끝으로 집필을 쉬고 있는 동안에도 ‘왜 다음 얘기가 안나오느냐’ ‘너 사기꾼이냐’ 별의별 말을 다 들었어요. 그래도 글을 안 썼는데, 병을 얻으니 머릿속에 ‘역사 속의 나그네'는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은 2070년대에 살던 주인공 이언오가 시간여행을 하다 500년 전인 16세기 말 조선시대에 불시착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았다. 21세기 주인공이 16세기 조선시대로 건너가 축적된 지식의 힘을 이용해 변화를 유도하는 게 핵심이다. 작가는 자신의 책을 ‘지적 무협소설’이라고 불렀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무협소설이 인기였어요. 1987년 ‘비명을 찾아서’를 처음 내고 난 뒤, 여러 매체로부터 소설 연재를 제의받았어요. 이왕 소설을 쓸 거면 무협소설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장풍’이 아닌 ‘지식’을 이용하면 더 재미있고 문학적으로 가치가 높을 거라고 봤어요.”

주인공 이언오가 낙후된 조선시대에서 보여주는 능력은 바로 지식이다. 그 힘으로 흉년에 저수지사업을 벌이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근대사회로의 변화를 유도한다.

작품에서 눈에 띄는 건 조선시대의 낙후성을 노예제도에서 찾는다는 설정이다. 작가는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확고하게 자리잡은 노비 제도가 종국적으로 조선을 약하게 만든 원인으로 보고 주인공을 통해 노비를 해방시킨다.

“인류 역사에서 우리나라만큼 노예제도에 가까이 간 나라가 없어요. 고착된 사회였죠. 더 문제는 그런 제도가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데도, 실학자 같은 지식인조차 그 제도를 묵인하며 수용했다는 거예요.”

노예 해방까지 시킨 주인공의 활약은 ‘영웅’이 부재한 지금 시대에 반가운 단비처럼 비칠 수 있다. 이념 대립이 심하고 리더십 부재로 의견이 충돌하는 요즘 세태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신의 해결)같은 지식인의 해결은 막힌 체증을 뚫는 만병통치약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소설가 복거일은 수술을 포기하고 '역사 속의 나그네' 나머지 3권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다음 작품으로 시집을 내고 싶다고 전했다. /사진제공=문학과지성사

“현대 대중소설은 ‘못난 사람’이나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문학적 기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극도 위대한 사람의 추락에서 그 진가가 드러나잖아요. 지식인이라는 영웅의 등장은 사회구조를 드러내는 일에 적합한 요소라고 봐요. 무엇보다 의식적으로 ‘나’를 지식인으로 추구해왔기 때문에 자화상 같은 모습이 책에 담겨있을 수도 있어요.”

출판사 카피에는 ‘참혹한 시대, 약자를 살피고 사랑을 나누는 이런 사람 한 명쯤 미래에서 와 준다면…. 영웅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소설’이라고 적혀있다. 이 문구만 보면 책의 면면은 변화를 넘은 개혁의 이미지도 엿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작가는 예술이 ‘운동’에 복무해야한다는 예술관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더 넓은 틀에서 바라봐야한다”고 강조했다.

신경숙 작가 표절 논란과 이에 따른 문단 권력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시장 경제 논리로 이해했다.

“손에 든 게 망치밖에 없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일 뿐이죠. 권력관계로 보면 모든 게 약자 대 강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논리밖에 안되잖아요. 신경숙 작가도 시장 논리로 다른 출판사로 옮겨갔을 때 말들이 많았지만,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선 가능한 일이잖아요. 좀 더 세상을 큰 틀에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시집을 내고 싶다고 했다. 한 권은 생전에, 나머지 한 권은 사후에 내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