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예금자 손실 떠안나…키프로스식 구제안 부상

머니투데이

김신회 기자

그리스 은행들이 예금자들의 손실 참여(bail-in)를 강제하는 내용의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소식통들의 말을 인용해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리스 은행 및 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리스 은행들은 8000유로(약 1000만원) 이상의 예금자들에게 최소 30% 이상의 헤어컷(손실)을 요구하는 긴급대책을 준비 중이다. 소식통들은 최소 한 곳 이상의 은행에서 이같은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예금자들의 손실 참여는 2013년 키프로스 구제금융 사태 때 은행권 구제금융 지원 조건의 하나였다. 국제 채권단은 당시 금융위기에 처한 키프로스에 100억유로를 지원하기로 하면서 자구책으로 키프로스 양대 은행의 10만유로 이상 예금주들에게 최대 40%의 손실을 강제했다. 채권단은 당초 예금 과세를 요구했지만 키프로스 의회의 반발로 무산됐다.

키프로스에선 당시 2위 은행인 라이키가 청산되는 등 은행권이 대폭 축소되는 구조조정을 겪었다.

FT는 국제 채권단이 앞으로 그리스 은행에 대한 자본 확충을 지원하면서 이같은 방식의 손실 참여를 요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 소식통은 "그리스가 다시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복귀하면 은행 부문에 대한 전면적인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헤어컷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 은행의 예금 보험한도는 유럽연합(EU) 규정대로 10만유로다. 그러나 그리스의 예금보험기금 규모는 30억유로에 불과해 은행권이 붕괴하면 예금자들의 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 애널리스트는 지난 6개월간 구제금융 협상이 겉도는 동안 그리스 은행권에서 자본이탈이 가속화해 예금액이 10만유로가 넘는 계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10만유로 이하의 예금은 보장이 되지만 은행 붕괴에 따른 손실 가능성을 감안하면 1회성 세금 형식으로 헤어컷을 요구하는 게 무리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이날 트위터에 "그리스 은행의 손실 참여에 대한 FT의 보도는 악의적 루머"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스페인 일간 '엘 문도'에 "채권단이 그리스에 테러를 저지르고 있다"며 "그들이 우리에게 은행 폐쇄를 강요한 것은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관리들은 그리스 은행에 대한 구조조정이나 예금자 헤어컷과 관련해 아직 결정된 게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극약처방은 유럽중앙은행(ECB) 그리스 은행이 지불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을 때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ECB는 그리스 은행권의 지불능력을 전제로 긴급유동성지원(ELA)을 하고 있다. 안드레아 엔리아 유럽은행감독청(EBA) 청장도 이날 "그리스 은행 개인 예금자들에 대한 헤어컷 계획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밝혔다.

그리스 은행들은 정부의 자본통제로 지난달 29일부터 문을 닫고 있다. 같은 달 27일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이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연장을 불허하면서 뱅크런(예금인출 사태)이 가속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리스 개인 예금자들은 ATM(현금자동입출금기)을 통해 하루 60유로까지만 인출할 수 있다. 해외 송금은 그리스 당국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은행 고위 임원들에 따르면 그리스 은행들이 ATM으로 공급할 수 있는 현금은 다음주 중반쯤에 바닥날 전망이다. 그리스에 대한 기존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지난달 30일 종료됨에 따라 ECB가 그 다음날 ELA 한도를 동결하면서 그리스 은행권의 자금난 우려가 고조됐다.

그리스의 한 은행 CEO(최고경영자)는 5일 치르는 국민투표 결과가 그리스에 대한 새 구제금융 지원 협상의 전개 속도를 결정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그리스 은행들의 지불능력이 이슈가 아니지만 그리스가 얼마나 빨리 새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돌입하느냐가 은행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는 국제 채권단이 이전에 요구한 긴축안의 찬반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막바지까지 국민들에게 반대표를 호소했다. 그는 투표 결과가 '찬성'으로 나오면 사임할 전망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 가능성이 커진다.

그럼에도 유로존에서는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추가 구제금융 지원 협상이 재개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렉시트의 파장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이날 유로존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가 '반대'로 나와도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이 투표가 끝난 뒤에 그리스에 대한 3차 구제금융 지원 여부를 논의할 것이라고 전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달 30일 채무상환을 위해 유로존 상설 구제기금인 유럽안정화기구(ESM)에 2년간 291억유로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