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것들은 어떻게 섞어놔도 예쁘니까…"

판소리 장단에 빠져 판소리 명창 배일동(왼쪽)과 함께 '지리'라는 프로젝트 팀을 결성한 호주 재즈 뮤지션 사이먼 바커(가운데)와 스콧 팅클러. 이들은 사전 연습도, 사전 대화도 없이 무대에서 눈빛과 감정만으로 즉흥 연주를 한다.

준비된 것은 없다. 언제나 나타나기를 고대할 뿐이고, 나타나면 마치 오랫동안 단련된 장인처럼 완벽한 하모니를 그려낸다. 그들에게 장르는 ‘껍질’이고, 연습은 ‘방해’다. 가슴속에 품은 정서의 교감, 그들은 그것 하나로 모든 걸 표현하며 완주한다.

피부색도 다르고 장르도 다른 이질의 연주자들이 ‘교감’ 하나로 뭉쳤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배일동, 호주 출신의 재즈 명인 사이먼 바커(Simon Barker, 드럼)와 재즈 트럼페터 스콧 팅클러(Scott Tinkler)가 그 주인공이다.


융합이 대세인 시대에 판소리와 재즈의 만남이 별난 풍경은 아니나, 이들이 구성한 팀 ‘지리’는 좀 독특하다. 각자 나라에 살면서 공연이 그리울 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즈처럼 ‘즉흥적’으로 만남을 제안한다.

그러면 호주 뮤지션들이 한국에 날아오거나, 판소리 명인이 다른 나라로 움직이는 식이다. 이 같은 비정규직 활동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공연은 여전히 ‘계속’된다. 11일 오후 5시 문화예술공간 ‘창선당’에서 열리는 내한(?) 무대 역시 즉흥으로 시작해 즉흥으로 끝난다. 공연은 단 한 차례 열린다.

호주 멜버른 재즈페스티벌에서 열창하고 있는 판소리 명창 배일동(오른쪽).

“우리가 그렇게 불안한 형태로 갑니다. 음반을 녹음할 때도 2시간 정도 아무 얘기 없이 들어가서 자유롭게 연주하고 빠지죠. 공연도 마찬가지예요. 사전에 어떤 대화 없이 모여서 상대방의 느낌, 눈빛, 감정만 교환하고 자기 연주에 몰입해요. 그게 순수 예술가의 멋 아니겠어요? 세상에 뛰어난 기획자나 아티스트들은 많지만, 인연에 따라 공연하는 팀이 얼마나 되겠어요.”(배일동)


그 인연에 두 서양 재즈 뮤지션이 합류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배일동은 동양 장단에 관심을 가진 바커(시드니 음악대학 교수)를 타악기 연주자 김동원 교수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서로 통했던 두 사람은 다큐멘터리 영화 ‘탱큐, 마스터 킴’을 찍었고, 2010년 개봉 때 팅클러가 영화에 감동하며 자연스레 뭉쳤다.

이들은 지리산에서 득음한 배일동의 흔적을 따 ‘지리’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팀을 결성하고 모든 활동을 ‘즉흥적’으로 하기로 했다.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만난 바커와 팅클러는 배일동을 “음악의 은인”이라고 극찬했다.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곳의 민속음악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배일동을 만나기 전까지 판소리는 그냥 여흥으로 들었을 뿐이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음악을 함께 하는 순간, 리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알게 됐어요. 이는 오로지 우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음악은 ‘퓨전 음악’(fusion music)이 아니라 ‘우정 음악’(friends music)이에요.”(사이먼 바커)

바커는 그를 “우리 시대 위대한 목소리를 지닌 사람 중 한 명”이라며 “그와 음악을 같이 하는 건 행운”이라고 전했다.

좀 더 진지한 언어로 답을 내놓은 팅클러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자연의 소리를 들을 때처럼, 그의 목소리는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걸 확신했다”고 했다.

트럼페터 스콧 팅클러.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느꼈다고 할까요? 그 자유는 수많은 예술형식의 통달에서 나온다고 봐요. 그래서 작업할 때마다 그를 제 스승이라고 여기죠. 음(note)과 구(phrase)를 그에게서 배우는데, 판소리는 인간을 감동시킬 줄 아는 고차원의 예술이고 표현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예술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에게서 완전한 기쁨을 배운 셈이죠.”(스콧 팅클러)

재즈를 전혀 모르던 배일동 역시 “형식은 몰라도, 동질 의식은 느꼈다”고 했다. “서양 음악은 대개 추상적이죠. 실제 감정을 추상으로 가리기 일쑤인데, 재즈는 그 속살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바커와 팅클러는 국악하는 사람들보다 더 깊이 판소리 장단에 맛을 본 뮤지션들이었어요.”(배일동)

프리 재즈 스타일의 즉흥 연주는 그렇게 시작됐다. 서로를 감싸 안는 동질 의식의 교류, 수십 년간 쌓아온 예술에 대한 이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험 등이 그들 내면에 본능처럼 꿈틀거린 것이다.

바커는 이를 “(악보없는) 자발적 상황이 가장 편안하다”는 말로, 팅클러는 “우리는 텔레파시로 일한다”는 말로 요약했다.

“우리가 하는 음악은 판소리에 나오는 대목 하나를 부르지만, 굳이 우리 장단을 따라올 필요가 없어요. 제가 사는 땅의 물맛과 호주 대륙을 적시고 온 물맛을 맞출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너’는 너대로 치고, ‘나’는 나대로 치면서 허튼 가락을 던져놓겠지만, 제대로 된 것들은 어떻게 섞어놔도 예쁘니까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배일동)

세 사람의 음악적 성질을 판소리에 비유하자면, 팅클러의 트럼펫과 배일동의 소리는 시원하고 장대하고 남자다운 동편제에 가깝고, 바커의 드럼은 동편제와 서편제 모두를 흡수하는 스타일이다. 서로 섞이고 융화하면서 배일동의 소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건 처음 얘기하는 건데, 한 5년 전 쯤에 외국에서 마이크 없이 공연한 적이 있어요. 드럼 소리는 옆으로 퍼지는데, 트럼펫만 앞으로 쭉 뻗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 소리를 따라가기 위해 저도 힘 있는 소리를 냈더니, 제 발성의 변화가 생겼어요. 더 웅장하고 튀고 에너지가 넘치는 소리가 나왔죠.”(배일동)

드러머 사이먼 바커.

판소리와 재즈의 리듬은 서로 조합되는 방식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리듬을 쪼개거나 스윙처럼 그루브(리듬감)가 느껴지는 부분에선 더욱 그렇다. 바커는 그러나 좀 더 미학적인 관점에서 판소리 장단을 해석했다.

“판소리와 재즈는 비슷한 구석이 많지만, 판소리는 좀 더 미적이에요. 높음과 낮음의 균형, 사운드와 움직임 사이의 연결은 마치 시 같아요. 그것은 제게 아주 중요한 지점이고, 한국 리듬에 관심을 갖는 주요한 이유이기도 해요.”(사이먼 바커)

바커는 특히 2005년부터 즉흥연주자들의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는 ‘킴나라 레코드’를 설립해 한국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도 한다. 이 음반사에서 ‘지리’는 이미 4장의 CD를 발매했고 수록곡은 아이튠스에서 서비스되고 있다.

이번 단 한 번의 공연을 관객이 어떻게 감상하길 기대하느냐고 물었더니, 팅클러가 이렇게 대답했다. “집중하지 말고 그 순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해요. 과정을 분석하지도 말고 그냥 자유롭게 즐기세요. 기쁨과 놀이는 깊은 표현과 기교만큼 중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