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등골 서늘하다 반전 쾌거~'스릴러'로 맞서볼까

나는 직업상 여러 종류의 책을 사서 읽는다. 미스터리 소설이나 에스에프(SF) 소설은 대개 구입하(거나 빌려 읽)고, 인문이나 역사 분야의 책도 중요하다 싶으면 될 수 있는 한 사는 편이다. ‘내용은 좋지만 곧 절판의 운명을 맞겠구나!’ 싶은 책은 반드시 소장해 둔다. 이런 이유로 어떤 책을 사고, 어떤 책을 사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책에 관한 정보에 늘 주의를 기울인다.

딱히 자랑거리도 아닌데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느냐면, 나름 책에 관한 정보에 밝다고 자부하는 나도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떤 책을 들고 가야 할지’를 항상 고민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전자책을 읽는 데 익숙하지 않다.


얼마 전 나는 휴가차 뉴질랜드에 다녀왔다. 편도로 꼬박 12시간쯤 걸리는 곳이다. 잠도 잘 만큼 자고 대한항공이 준비한 영화도 두어 편 봤지만 ‘아직도 다섯 시간이나 남았단 말인가’ 하고 몸부림치던 나를 구원한 건 ‘쥐 사나이’였다.

‘랫맨’은 아마추어 록 밴드 구성원의 이야기다. 평범한 학원물 같다. 하지만 주인공의 누나와 연인이 죽어 나가기 시작하면 더는 지겨움 따위 느낄 겨를이 없다. 사건이 일어난 곳을 고려할 때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명확해 보이는 범인 쪽으로 독자를 몰아넣고 뒤에서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것이 미스터리의 본령 아니던가.

일찍이 일본 미스터리 소설계를 석권한 이 작품이 한국에서 번역본으로 출간되기까지 출판사를 교체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랫맨’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반전이 참신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과연 그랬다. 쓰나미급 반전이 몇 번이나 들이닥치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만약 내 가방에 들어 있던 책이 염상섭의 ‘삼대’였다면 어땠을까. 영화 ‘에어플레인’에서 옆자리 승객의 지루한 얘기에 지친 끝에 머리에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긴 이와 비슷한 길을 걸었으리라 짐작한다. 5년 전 11시간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날아가며 했던 경험이기도 하다. 물론 ‘삼대’는 약간 농담이고.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아니, 그런데, 뭐? 일본 미스터리 소설은 당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걱정 마시길. ‘호러 킹’의 자리에서 이제는 미스터리 작가로 우리 앞에 선 스티븐 킹이 있으니까.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훔친 메르세데스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깔아뭉개고 도주한 미친놈에 관한 이야기다. 그를 쫓는 이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확립한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에 곧잘 등장하곤 하는 노회한 전직 형사다. 은퇴 후 하릴없는 삶을 살다가 급기야 자살을 꿈꾸는 전직 형사에게, 차로 사람을 쳤을 때의 희열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마스터베이션을 했다”는 ‘메르세데스 살인마’가 자신을 잡아보라고 도발하는 편지글로, 소설은 시작된다. 덕분에 삶의 의욕을 회복한 형사는 컴퓨터에 밝은 소년의 도움을 받아 역으로 범인을 도발하는데, 이 대목이 진부한 듯하면서도 짜릿하다.

작가는 전통적 탐정물의 캐릭터와 틀 속에 게시판 설전 비슷한 장면을 연달아 집어넣음으로써 완성도 높은 미스터리 소설을 만들어 냈다. 스티븐 킹의 모든 소설이 지금껏 그래 왔듯 이 책 역시 술술 읽힌다. 요즘처럼 ‘묻지마 범죄’가 횡행하는 시대에 대관절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의식도 빈틈없이 들어가 있다.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다음 권과 다음다음 권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이 3부작이라면 여기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지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꽤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덕후’ 제위들에게도 낯선 홍콩 작가의 작품이다.

‘13.67’은 어떤 사건이 최초로 일어난 해인 1967년과 최후의 사건이 일어난 2013년을 가리킨다. 재미삼아 쓰기 시작한 추리소설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등단했다는 저자는 2011년 무렵 ‘안락의자 탐정’을 모티브로 단편을 쓴다. ‘안락의자 탐정’이란 사건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도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범인을 맞춘다든가 하는, 천리안형 콘셉트의 탐정을 뜻한다.

찬호께이가 만들어낸 단편 속 안락의자 탐정의 직업은 경찰이다. 작가는 안락의자 탐정이 등장하는 단편을 어떻게 확장해볼까 고민하다가 문득 경찰을 탐정으로 내세운 미스터리 소설에 과연 독자들이 설득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영화 ‘무간도’를 보신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이후에, 홍콩 경찰의 위상이 말도 안 되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뭐냐면, 각각의 단편은 본격 미스터리의 형태로 쓰되 이 단편들을 전부 엮으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회파 미스터리가 되도록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본격 미스터리란 트릭과 반전을 무기 삼아 범인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춘 퍼즐 형식을 말하고, 사회파 미스터리란 범인이 누구인가에 집중하기보다, 그 범인이 왜 그 사람을 죽였는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춘 장르다. 즉, 사회현상을 반영한 인간의 본성을 구현하는 데 주목한다고 할 수 있겠다. 덕분에 ‘13.67’은 주윤발의 버버리 향취 물씬 풍기는 독특한 형식의 연작 미스터리로 거듭났다.

음, 이 정도로 내 임무는 마무리할까. ‘반지의 제왕’ 촬영지를 돌아보겠다며 다녀온 뉴질랜드행으로 일찌감치 나의 휴가는 끝났다. 이 계절에 누릴 수 있는 몇 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남은 미스터리 소설이 열두 권이나 있으니 다행이다. 여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