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호접몽'…내일과 죽음을 대하는 시인의 방식

아무도 없는 깊은 숲속을 혼자 걷는 사내가 있다. 명상을 하듯 느릿느릿 걷던 사내가 멈춰선 곳은 어느 무덤가 묘비 앞. 또 다른 사내는 이탈리아 아드리안 해안을 혼자 걷고 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두이노 성. 숲속을 혼자 걷는 이는 장자장주이고, 아드리안 해안을 혼자 걷는 이는 시인 릴케다. 어느 순간, 장자는 릴케가 되기도 하고 릴케는 장자가 되기도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활달하게 동서양을 넘나드는 신현락 시인의 시라서 가능한 이야기다. 그의 시는 장자의 호접몽에 닿아 있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렀다.


꿈 속에 장자가 나비 차림으로 다녀간 이후로/ 꽃잎의 장르에 따라 장묘를 나누고/ 나비를 선택하는 구분이 흐릿해졌다// 두이노 성의 해변을 산책하던/ 가장 크고 신비한 장미나비는/ (중략) // 어느 장례든지 나비가 나는 걸 금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묘비는 나비의 죽음을 기록한다// 나는 장자가 된 나비의 비문은 알아보지 못했으나/ 무덤 속에서도 장미의 매듭을 풀지 않는 나비를 화장한 적은 없다
-‘나비장’ 일부

그의 시에는 ‘내일’과 ‘죽음’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내일과 죽음을 구별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장자를 이야기하면서 릴케를 떠올리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피상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인 변화는 없기에 내일과 죽음이 서로 구별되는 건 아니다. “오늘밤은 있고 내일은 없고/ 지금 잠들면 죽을지도 모르고”(‘내일의 묵시록')에서 알 수 있듯 시인에게 내일과 죽음은 지극히 묵시적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비가 행간을 날아다니지만 형체가 뚜렷하지 않다. 그것은 시인이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유한성과 무한성, 고정성과 변화성을 동시에 가지는 이미지를 추구하고 깊은 사유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중략)/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보면 눈이 먼다/ 심연의 기억은 매혹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설원이 허물어지고/ 만지면 사라지는 눈꽃 같은/ 계절은 그 세계의 내부를 지나고 있다// 이것은 불구의 시각을 끌고/ 약속 미정인 장소에서 만난 황홀한 옛 이야기다
- ‘화이트아웃’ 일부

신현락의 시를 이해하는 중요 키워드는 서사, 즉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해설 대신 수록한 ‘나의 시를 말하다’에서 “내 시에 이야기적인 요소가 있다면 신화적인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상징이나 이미지가 없는 불완전한 이야기, 끝이 없는 현재의 이야기, 끝이 처음이 되지 않는 이야기, 중간이 뜯겨져 나가 인물이 사라져버리거나 언제든지 치명적 도약이 가능한 이야기”라 했다. “약속 미정인 장소에서 만난 황홀한 옛 이야기”는 조각난 신화의 서사, 혹은 처음과 끝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Ouroboros)적인 시간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가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멀리 왔다고 생각했으나 돌아보니 겨우 문 밖”이고, “여기를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는 과거”인 것이다. 그가 펼쳐놓은 깊은 사유의 숲속에 나비가 난다.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현락 시인은 시 ‘소금사막’으로 제3회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세 번째 시집 ‘히말라야 독수리’가 2012년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 도서로 선정되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집으로 ‘따뜻한 물방울’, ‘풍경의 모서리’, ‘히말라야 독수리’가 있다.

◇ 그리고 어떤 묘비는 나비의 죽음만을 기록한다=신현락/북인/174쪽/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