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쳐 톡톡]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

사극 '징비록'이 끝났다. ‘징비’란 '시경' ‘소비편’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라고 한다.


이 사극은 1592년에서 7년간의 난이 끝난 뒤 영의정 겸 도체찰사를 지냈던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저술한 동명 사서를 근간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이로써 당대와 치열하게 부딪친 한 재상과 조선의 힘을 조금 알게 되었다.

이뿐이 아니다. 요즘 웬일인지 이런 ‘조선 다시 알기’ 기회가 꽤 늘고 있다. 덕수궁의 서양식 대궐인 석조전에 가면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물산을 장려해 200여개 기업을 만들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전차를 수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전차가 다닐 도로와 전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뜻밖의 내용들이다. 네이버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아주 생소한 효명세자로 인해 조선의 궁중 무용과 시문이 부흥했다. 후에 효명의 부인 신정왕후의 섭정 때 남편의 꿈을 잊지 못한 신정왕후가 흥선대원군을 통해 경복궁을 재건하게 했다는 것도 새롭다.

역사는 확실히 물고 물린다. 최근에 발간된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저자는 공자가 17-8세기 유럽 계몽주의와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을 살피면서 18세기 영 정조의 조선이 정치, 도덕, 교육과 민생 분야에서 당시 유럽을 앞서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것도 좀 생소하다. 역사가 이덕일의 주장으로 가면 물론 이 생소함은 더 커진다.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현재다. 역사를 보는 것도 현재를 징비하기 위함이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경하할 일이다. 그런데 내 삐딱한 눈에 위험한 징후가 좀 보인다. 그 중에서도 어떤 세력들이 특히 위험해 보인다.

한국이 위기라는 진단들이 나오는데도 언론, 정치, 교육계부터 (대)기업의 마부장과 미생들까지 두껍게 깔린 안전추구 세력들. 세스 고딘의 '이카루스 이야기'에 나오는 아티스트의 삶 보다는 그저 “ 태양 가까이 가면 날개가 녹는데...” 란 두려움만으로 눈 내리깔고 묵묵히 받아 적기만 하는 세력들.

이들을 보다가 혹시 닮은꼴일까 싶어서 조선시대 세도정치를 검색해 봤다. 세도정치는 두 가지 뜻이 있단다. 하나는 세도(世道)정치다. ‘세상 가운데의 도리’와 ‘그 도리를 이끌어나갈 책임’도 뜻하는데 이는 원래 국왕에게 있어야 했다. 세종과 정조가 꿈꿨던. 그러나 점차 외척 신료들의 발언권이 강해짐에 따라 19세기 순조에서 철종 때의 노론 권세가들이 자기 세력 공고화에만 골몰하니 이를 황현, 안확 등이 세도(世道)를 세도(勢道)로 비꼬아 비판했다고 나온다.

이 세도정치는 조선 후기경쟁력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데, 훨씬 앞 시기부터 기층에서는 민중의식이 성장하고 상업과 농업에서 새로운 성격의 경제력과 새로운 사상을 갖춘 인물들이 성장했지만 그걸 억압함으로 퇴보를 자초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 19세기 국제 정세로는 ‘붉은 여왕 효과’처럼 두 배 속도로 변화해도 시원찮았던 판에 세도정치는 '빽 도'를 한 것이다.

광복 70주년 전후한 요즘이 혹시 세도정치 시즌 2는 아닌지? 꼰대들은 100세 시대와 저성장 위협에 잔뜩 웅크려 있고, 이젠 물러나도 될 사람들이 회전문과 낙하산 인사나 노리고, 민간에선 있으나마나한 거수기 사외이사에 로비스트들이 늘고. (대)기업에선 상상력과 스피드와 모험 대신 줄서기와 영혼 없는 모방 월화수목금금금 근면성이 부활하는 것들이 꽤 보여서다. 이미 O피아, 마부장, 거수기, 지역 권력, 좀비 등으로 이름 붙여진 이들이 신종 세도정치 세력들은 아닌 건지?

광복 70주년 슬로건이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이라는데 과거를 위대하게 하고 새로운 도약을 하려면 이 세도정치화 경향을 징비하고 징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