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의 절규, 1190번째 외침…"일본이란 바위 깎아낼 것"

5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190번째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집회에서 길원옥 할머니(가운데 왼쪽)와 김복동 할머니(가운데 오른쪽)가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사진=김종훈 기자

"우리들은 때를 잘못 타고났어. 힘없는 나라에 태어나 허무하게 끌려가서 희생이 됐지만. 앞으로 다시는 우리 같은 일이 생겨서는 안 돼."

5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어김없이'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정기 수요집회에서 만난 위안부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90)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할머니들의 집회는 이날로 23년째, 1190회를 맞이했다. 1회 집회 당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집회를 계속하기로 했지만 이렇듯 오랜 세월 계속될 줄은 할머니들도 예상치 못했다.


◇23년, 1190번의 외침…이젠 시간이 없다
이날 김 할머니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일본은 세계 2차대전에서 잘못한 일들을 전부 다 사죄해야 합니다. 후손을 생각해서라도 끝끝내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길 부탁합니다"라고 거듭 당부했다. 23년째 조금의 보탬이나 덜어냄조차 없는 한결같은 호소였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피멍울 맺힌 외침에도 일본 열도로부터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수요집회는 단일 주제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집회로 기네스 기록을 갖고 있다. 일본 정부의 '모르쇠' 역시 기네스 기록 수준인 셈이다.

첫 시위 후 23년이 지난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48명뿐이다. 지난달 5일에는 고(故) 최금선 할머니가 끝내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는 90세, 80세다. 피해자들이 명예와 인권을 회복받을 수 있는 시간이, 일본이 참회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일본 타박 죄송하다" 근령씨 발언은 '식민사관' 그 자체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선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과 수요집회를 주도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대한 비난 여론마저 제기되고 있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의 여동생 근령씨는 지난 4일 일본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에서 게재된 인터뷰 영상에서 "우리가 위안부 여사님들을 더 잘 챙기지 않고 자꾸 일본만 타박하는 뉴스만 나간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극우성향 단체들은 정대협 주요 간부 및 그들의 배우자 등의 과거 진보단체 활동 경력 등을 이유로 "정대협은 좌파 단체", "위안부가 한일관계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극우성향 사이트 '일간베스트'에서도 할머니들의 향해 "일본군에게 몸을 팔았다"는 등의 글들이 논란이다.

이에 대해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근령씨의 발언은 일본 강제침탈기 때의 식민사관 그 자체로, 역사교육이 부족함을 방증하는 것"이라며 "세계적으로 순수성을 인정받는 수요집회에 그릇된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5일 수요집회, 초등생부터 일본인까지 참가…"일본이라는 바위 깎아낼게요"
녹록치 않은 환경에도 여전히 할머니들의 곁을 지키는 것은 국민들의 성원이다. 광복 70주년을 열흘 앞두고 열린 이날 집회에도 할머니들 곁에는 정대협 관계자를 비롯한 인권운동가, 초·중·고등학생과 독일인, 일본인까지 모여 한 목소리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초등학교 4학년 김민준양, 임소민양은 손편지를 낭독하며 "일본은 심술쟁이 바위처럼 귀를 막고 있지만 파도와 비바람에 깎이게 돼 있어요. 우리들이 힘찬 파도가 되고 성난 비바람이 돼 사과하게 만들게요"라고 말했다. 또 일본 나고야에서 왔다는 이노우에 목사는 "이 자리에서 안부 문제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며 "일본으로 돌아가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시위는 오는 14일 제3회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이하는 의미도 있다. 1991년 8월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진실을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에 맞서 최초로 공개증언을 한 날이다. 윤 대표는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침묵을 깨면서 수많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용기를 얻고 피해를 신고하게 됐다"며 "어떤 힘도, 어떤 국가권력도 여성의, 약자의 인권을 유린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날"이라고 의의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