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죄 처형' 최능진씨 64년만에 무죄…명예회복은 이제부터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청사 /사진=뉴스1

과거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공산당 부역자로 몰려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고(故) 최능진씨에게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최창영)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1951년 그릇된 공권력으로 운명을 달리한 이후 64년 만에 최씨가 누명을 벗는 순간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 중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자료는 재심 대상 판결문이 유일하다"며 "그곳에 기재된 피고인의 진술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귀국해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하는 등 최씨의 생애와 경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최씨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에서 활동하며 친일파 숙청을 요구하고 백범 김구 선생 등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승만의 정적'…유죄에서 무죄까지, 64년간의 역사

최씨는 1899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최씨는 해방 후에는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 친일 세력 퇴출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씨는 1948년 제헌국회 선거 때 이승만 박사를 견제하기 위해 같은 지역구인 동대문 갑구에 출마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거위원회는 최씨가 후보 등록 때 제출한 추천인 일부의 서명이 위조됐다며 그의 후보 등록을 무효화했습니다. 이런 탓에 최씨는 이승만 박사의 '정적'으로 평가받습니다.

최씨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6·25 전쟁이 터졌고 최씨는 정치범 석방을 계기로 풀려났습니다. 최씨는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서 정전·평화 운동을 벌이다 1950년 10월 서울이 수복된 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1951년 1월 군법회의는 최씨에게 총살형을 선고했습니다. 재판은 단심으로 끝났고 최씨는 1951년 2월 사망했습니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최씨에 대해 "이승만 박사에게 맞선 뒤 헌법에 설치 근거도 없고 법관의 자격도 없으며 재판관할권도 없는 군법회의에서 사실관계가 잘못된 판결로 총살됐다"고 결론을 내리고 재심 수용을 권고했습니다.

◇"국립묘지에 모시고 싶다"…진정한 명예회복 위해서는

최씨의 아들인 고(故) 최필립 정수작학회 이사장과 최만립 대한체육회 원로고문은 과거사정리위의 진실규명 결정이 나오자 곧바로 재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첫 재판은 지난 3월에서야 열릴 수 있었습니다. 재판관할권 문제 때문이었죠. 그 사이 최필립 이사장은 세상을 떠났고 최만립 고문이 재심을 추진했습니다.

그간의 재판 과정에서 최만립 고문은 "형님이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며 "선친은 이승만과 싸운 죄밖에 없다"고 수차례 주장했습니다. 또 "선친은 돌아가시기 전 '정치적으로 가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다 부르고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재판부는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뒤 이례적으로 아래와 같이 짧은 소회를 밝혔습니다.

"우리 사법체계가 성숙되지 못했던 6·25 전쟁이라는 혼란기에서 군사법원의 그릇된 공권력으로 허망하게 생명을 빼앗긴 고인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합니다. 뒤늦게나마 공적으로 선언하는 재심 판결이 고인의 인격적 불명예와 불행한 과거사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고인과 인고의 생을 지내 온 유가족이 명예를 회복하고 자긍심을 되찾는 위안의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최만립 고문은 재판이 끝난 뒤 "사법 정의가 이뤄졌다는 생각에 상당히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친의 한을 풀었고 명예회복을 했다"고도 했습니다. 이어 "지금 이북 5도민들이 모인 파주 동화묘지에 (선친의) 묘소가 있는데 모든 절차를 밟은 다음 국립묘지에 모시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이제라도 최씨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사법부가 재심으로 무죄를 받은 피고인에 대해 이례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것도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이번 판결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늦었지만 그의 생전 활동이 다시 평가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최씨의 명예를 진정으로 회복시켜 주는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