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현실의 고통을 비틀어놓은 언어

머니투데이

이철경 시인.문학평론가

독특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현대 시의 또 다른 전위(前衛)적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함기석 시인이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를 발간했다.

그의 시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이미지들에 대해 김점용 시인은 “돌발적인 의외성과 우연성, 수학적 상상력과 양자 물리학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고봉준 문학평론가는(시집해설에서) “체험이나 고백 같은 사적인 영역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현실을 관통한다. 결코, 현실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다. 시인은 “고백적 진술”을 비틀어서 독자에게 낯설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생소한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시적 깊이를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러한 시인의 시 쓰기는 한동안 한국 시단에 휘몰아친 미래파의 시와 다르다. 시인의 상상력 극대화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전개를 시도한다.

파도가 모래해변으로 나와
하얀 혓바닥으로
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게들이 하늘을 본다
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원을 그리며 도는 별들 음표들 시간들

누가 주검을 연주하는 걸까
건반 사이에서 새들이 날아올라
캄캄한 허공으로 흰 쌀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 ‘오르간’ 中

이러한 상상력은 낯설고 생소한 이미지로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들이 하늘을 보거나, 북극성 조등(弔燈)에 불이 켜지고 있고, 별을 음표에 비유하는’ 등은 다소 초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익숙한 이미지를 낯설게 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시적 메타포를 포획한다.

‘저녁의 비행운’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다. 허기지고 비루한 시인의 일상이 그려진다.

아픈 아이를 안고 창밖을 바라본다
내일이 어린이날인데 하늘엔 어두운 핏줄만 뻗어가고
내가 가꿔온 꿈이 사마귀처럼 사각사각
내 내장을 파먹고 아이의 웃음을 파먹고 있다
옆집 무화과나무 아래 싹튼 상추들이 모두
만 원짜리 지폐로 보인다
저 싱싱한 지폐에 구름과 삼겹살을 싸 배터지게 먹고
돼지가 되고 싶은 날

-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中

꿈과 상반된 가난한 현실은 초라하다. 오죽하면 ‘(푸른) 상추’는 (푸른) ‘만원 짜리 지폐’로 보이고, 그 ‘싱싱한 지폐에 삼겹살을 싸 배 터지게 먹고’ 싶다고 노래했을까.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고 말한 것처럼 시인의 시는 깊은 사유로 보듬은 결과물이다. 그 고통의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처럼” 진주를 보듬은 시인의 상처를 보여준다.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함기석, 160쪽, 민음사,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