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문화전쟁'…음악공간 둘러싼 현대와 SK의 '묘한 신경전'

비틀스의 녹음스튜디오를 만든 일본 건축가 샘 도요시마가 설계한 SK텔레콤의 자회사 아이리버의 '스트라디움' 녹음실. 반사판을 이용한 이 공간은 녹음실과 콘서트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사진제공=아이리버

이태원 길을 마주하고 대기업 현대와 SK의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두 기업 모두 음악 공간을 잇달아 선보이며 피할 수 없는 문화 전쟁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지난 5월 먼저 문을 연 현대카드의 문화공간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언더스테이지'와 5개월 만인 10월에 개원한 SK텔레콤의 음악 문화공간 '스트라디움(STRADEUM)'이 그 주인공이다.

두 공간 모두 젊은 층이 속속 모여드는 이태원의 중심 거리에 '음악'이라는 소재로 정면 승부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두 공간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음악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느끼는 재미는 비슷할지 몰라도, 그 재미의 속성은 완전 다르기 때문.


현대카드가 값비싼 재료를 듬뿍 묻혀 고급스러움에 몰입했다면, SK텔레콤의 자회사인 아이리버가 선보이는 공간은 꼭 필요한 음악의 양념만 묻혀 목표를 일원화했다. 현대카드가 '멋'에 충실했다면 SK텔레콤은 '맛'에 몰두했다고 할까.

지난 5월 이태원에 문을 연 현대카드의 문화공간 '뮤직라이브러리+언더스테이지'. 인사동 쌈짓길을 만든 최문규 교수가 내부 무대를 설계하고 프랑스와 포르투갈 아티스트가 외관 벽화를 그리는 등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사진제공=현대카드

◇ 현대카드, '종합선물세트'로 무장하다

지하 2층(무대), 지상 2층(라이브러리)에 마련된 현대카드 공간은 종합선물세트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기존 건축물에서 볼 수 없는 도회적인 구도와 세련미의 건축 양식은 이 공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상징이다.


겉의 화려함만큼 속도 풍성하다. 음악뿐 아니라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콘텐츠를 관람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을 갖췄다. 형식은 음악 문화공간이지만, 내용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인 셈.

음악 전문가 대신 '컬처 큐레이터'라는 용어로 이 공간을 책임지는 전문가 군을 형성한 것도 '음악'이라는 한 장르에 묶이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유희열, 윤종신, DJ소울스케이프, 김수로 등이 참여하는 컬처 큐레이터들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콘서트를 비롯해 연극, 뮤지컬 등의 콘텐츠를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지하 2층 '언더스테이지'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탠딩 무대고, 지상 2층에 마련된 '뮤직라이브러리'는 1950년대 희귀 음반들이 모여있다. 한눈에 봐도 막대한 금액을 쏟아부어 만든 '특별한 공간'임을 내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는 흔적들이다.

최근 문을 연 이태원의 음악공간 '스트라디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1만여 장의 나무벽돌로 장식한 외관은 단조롭지만 따뜻한 느낌을 준다. /사진제공=아이리버

◇ SK텔레콤, '음악' 단품으로 승부하다

아이리버가 꾸린 '스트라디움'(STRADEUM)은 길 건너 현대에 비하면 초라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근사한 엘리베이터로 관객을 맞이하는 현대와 달리, 좁은 계단을 4층까지 오르락내리락 해야한다. 하지만 이곳은 잡다하게 이것저것 펼쳐놓지 않고 '음악' 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건축물도 내용물도 일원화한 것이 특징이다.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이 비틀스의 녹음 스튜디오를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 건축가 샘 도요시마가 설계한 2층 스튜디오다. 여기에선 음반 녹음과 콘서트가 자유자재로 이뤄지는데, 설계에 숨은 비밀이 있다.

스튜디오(녹음)는 잔향이 필요하지 않고 콘서트홀은 잔향이 요구되는 극과 극의 공간적 사운드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위해 벽면에 반사판을 만든 것이다. 이 반사판은 벽문을 열면 흡수판으로 바뀌어 잔향을 없애고, 닫으면 잔향을 높인다. 도요시마는 이를 “이곳의 비밀병기”라고 소개했다.

이 공간에선 기존에 익숙한 프로그램들이 재생되는 듯 보이지만, 좀 더 깊고 넓다. 컬처 큐레이터가 아닌 음악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 2012년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어워드에서 클래식 부문 최고 기술상을 받은 황병준(엔지니어) 사운드미러 대표가 직접 나서 사운드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진다.

이를테면 스튜디오에서 공연한 사운드(음원)는 곧바로 디지털로 변환돼 건물 곳곳에서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이 그것이다. 황병준 대표는 “음악 생산자와 감상자가 실시간으로 만나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음악 전문가의 해설과 비하인드 스토리로 만나는 음악 감상 프로그램 '리슨&워치'도 눈길이 가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지상 2층에 마련된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1만장의 아날로그 음반과 3000권의 음악 도서가 구비됐다. 희귀음반 250장도 만나볼 수 있다. /사진=김창현 기자 chmt@

◇ 현대카드의 희귀음반 구입비, SK텔레콤의 전체비용…승자는?

현대카드가 가장 신경 쓴 곳은 희귀 음반들이 모여있는 '뮤직라이브러리'다. 이곳엔 지난 2년 여간 11개국을 돌며 고른 희귀음반 250장을 만날 수 있다. 현대가 이 음반을 수집하는 데 쓴 비용만 수십억 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SK텔레콤의 아이리버가 쓴 전체 비용은 현대가 쓴 음반 비용 정도에 해당하는 30억 원이다.

현대는 수년 전 디지털 음원 서비스의 실패 경험을 만회하기 위해 오프라인에 더 강하고 화려한 품목들을 다양하게 심어넣었다. 고급화와 다양성이라는 화두에 집중하다보니, 볼 건 많은데 어디 하나 집중하기 힘든 딜레마도 함께 잉태된 모양새다. 현대카드 관계자도 “이번 문화공간은 퀄리티있는 다양한 문화를 담는 게 주요 목표”라고 말했다. 하지만 설치된 무대가 음악이 아닌 연극이나 뮤지컬을 소화하기엔 버겁고, 잘 차려진 희귀 음반이 대중의 보편적 감성에 맞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이리버의 경우 음악 자체에 한정한 테마는 음악 마니아들이나 음악을 좀 더 깊게 알고 싶어하는 이들이 만족할 정도로 충분해 보였다. 박일환 아이리버 대표는 “이 문화공간은 고급스럽다기보다 소박하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며 “음악이라는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데 충실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음악을 기능이 아닌 감성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짰다는 점에서 대중과의 공통분모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기도 했다. 음악은 사운드로 출발하며, 그 사운드는 원음에 가까운 본질에 수렴돼야 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음악에 스토리는 가치를 배가시킨다는 원칙에 입각한 셈이다. 박 대표는 “이 공간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플랫폼으로 로컬이 아닌 글로벌한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음악'만 보면 SK텔레콤의 아이리버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듯 보이지만, '문화'로 보면 현대카드의 왕성한 콘텐츠와 고급화를 무시할 수 없다. 이태원에 몰려드는 세대들이 어떤 점에 주목할지 문화 전쟁 1라운드를 준비하는 두 대기업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