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가끔은 '돌발여행'도 좋다

안면도 백사장항구/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벼르고 별러 촘촘한 계획을 세운 뒤 떠나는 것만 여행일까? 그런 정의에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여행은 가볍게 떠날수록 좋다.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질 필요도 없다. 꼭 멀리 가야하는 것도 아니다. 길을 나서서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어디를 어떻게 가든 여행의 조건은 이미 충족된 것이다.


여행작가라는 직업 때문에, 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미안할 때가 없지 않다. 여행이 싫어서가 아니라 갈 수 없어서 못 가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경제적 사정 때문에, 일에 치여서, 건강이 안 좋아서, 누군가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아무리 여행을 예찬해봐야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문을 나서는 순간이 여행의 시작’이라는, 내 나름의 잠언이다. 잠언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실천한다. 계획하거나 목적을 갖거나 멀리 가지 않아도, 마음먹기 따라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밖에 일이 있어서 잠깐 외출할 때도 나는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고 출발한다.

문을 나서는 순간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여행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도 지하철을 타도 여행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도시의 풍경 역시 무심하게 지나칠 때는 늘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먹고 살펴보면 매 순간 달라진다. 아름다운 것도 흉한 것도 무엇 하나 의미 없는 것은 없다. 그렇게 스쳐가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고 글로 쓴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에 곧잘 나를 대입해본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삶의 의지를 배우고 지혜를 얻는다.

가끔은 예정에 없었던, 말 그대로 ‘돌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며칠 전 다녀온 안면도 여행이 그랬다. 가까운 이들과 함께 즉흥적으로 방향을 잡은 곳이 안면도였다. 여행을 떠날 만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고 든다면 겨울바다를 보고 싶었다는 것 정도. 사실은 그저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누가 가벼운 여행을 제안한 순간 타당성을 따지고 망설이다 보면, 그 여행은 이뤄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는 그조차 사치겠지만, 가끔은 무리해서라도 그 정도의 호사는 누려볼 필요가 있다.

백사장항 앞 갯벌/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길로 나서는 순간 여행은 시작됐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동행한 이들과 나누는 대화도 행복했다. 집안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글 이야기, 온갖 걱정거리들…. 때마침 눈이 내렸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들은 얼마나 큰 선물을 갖고 오는지. 순식간에 흰옷으로 갈아입은 산과 들은 환호성을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안면대교를 건널 때는 안면도라는 섬이 화제에 올랐다. 여행은 알고 가는 것만큼 더 많이 보이고 재미도 더한다. 안면도는 한반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이다. 도성과 가까운 탓이었는지 역사가 조금 기구하다. 원래는 섬이 아닌 곶이었다. 하지만 삼남지역의 세곡을 실어 나르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조선 인조 때 지금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파서 배가 지나가 게 만들었다. 졸지에 육지에서 섬이 된 것이다. 1970년 다리를 놓아서 다시 육지와 연결됐다.

안면도에는 가볼만한 곳이 많다. 낙조가 아름다운 꽃지해수욕장 등 곳곳의 해수욕장은 물론, 단일 소나무 숲으로는 세계 최대라는 안면송(安眠松) 군락지도 장엄하다. 독특한 풍경을 자랑하는 안면암도 찾아가볼 만하다.

우리는 조금 쓸쓸해 보이는 항구를 찾아들었다. 가능하면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한다는 내 원칙이 한몫했다. 방해할 사람 없는 한적한 곳에서 풍경을 온전히 몸 안에 들일 때 행복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

묵묵히 한 겨울을 건너고 있는 바다는 고요했다.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은 배들은 자궁처럼 안온한 포구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가끔 갈매기 한두 마리가 바람을 안고 날아올랐지만 금세 다시 날개를 접었다. 사람의 걸음이 끊긴 길 위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음식점에 마주앉아 눈(目)을 눈(雪) 내리는 세상에 얹어두고 술잔을 나누었다.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 여행은 결코 멀리 가거나 화려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