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자식빼고 다 바꿨던 삼성, 이젠 '영혼'도 바꾼다

삼성이 조직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추진한다. 수직적 구조를 수평으로, 일사불란 대신에 창의와 자발성을 쫓는 변화다. '관리의 삼성'으로 대변되는 삼성의 기업문화가 80년 만에 뿌리 채 바뀐다.

과거 추격자·압축성장·하드웨어 중심 시대에 걸맞은 문화나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78,600원 ▲3,100 +4.11%) 부회장의 강력한 의지다. 융·복합 시대를 개척할 퍼스트무버(선도자)로 거듭나야 하는 삼성이 사업재편이라는 '몸통' 정비에 이어 '영혼'을 바꾸는 '문화 대수술'에 들어간 셈이다.


22일 삼성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4일 경기도 수원 본사에서 임직원 대표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업문화 혁신 선포식'을 연다. 행사 이후에는 전 직원들이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사내방송과 설명회 등 내부 홍보가 이어진다.

이날 선포식은 단순 캠페인 수준이 아니라 조직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는 선언적 의미라는 게 삼성의 설명이다. 선포식에서는 방향성만 우선 제시되고 구체적인 실행방안은 순차적으로 나올 예정이다.

핵심은 직원이 자기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상명하복, 질서와 체계가 잡힌 효율적 시스템은 그동안 삼성의 강점으로 꼽혔지만 급변하는 세상에 이제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구성원들의 수평적 관계 속에 자율과 창조가 최우선시되는 실리콘밸리 벤처기업의 문화를 과감히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승진·상벌체계 등 인사시스템, 야근과 회의·보고 방식 등 업무문화, 음주·회식·언행·호칭 등 생활문화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한다.

직급체계 단순화를 추진하고 연공서열이 아닌 성과 위주 보상체계가 강화된다. 근절되지 않는 '회의를 위한 회의', 불필요한 야근 등도 실제로 없앤다.

업무공간도 미국 실리콘밸리의 혁신기업들처럼 칸막이가 없는 개방형으로 바꿀 예정이다. 현재 상무급 이상 임원들은 칸막이로 개인 공간을 구분해 놓거나 개인 사무실(부사장급 이상)을 두고 있지만 점차 이를 없애 보다 수평적이고 자유분방한 업무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임직원들 간에 위계질서를 드러내는 호칭도 달라진다. 직급체계 개편과 별개로 '과장님', '부장님' 식의 '장(長)'자를 붙이는 호칭은 근절한다. 이미 제일기획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은 '프로'로 호칭을 바꿨다.

이 부회장의 의지가 분명한 만큼 혁신작업은 각 사업부장(사장·부사장급)을 중심으로 강도 높게 추진된다. 향후 혁신 성과를 평가해 미흡한 점이 발견되면 담당 관리자를 문책하는 강제적 방식도 동원된다.

이미 '컬쳐혁신, 사업부장으로서 나는 [ ]을 하겠다'와 같은 문구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단지(斷指)를 연상케 하는 손 모양까지 넣은 사내 홍보영상이 만들어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머니투데이 자료사진

일각에서는 80년 가까이 쌓여온 기업문화가 바뀌긴 어렵다는 회의적 시각도 내놓는다.

하지만 삼성은 기존 조직문화 덕분에 오히려 변화가 쉽다는 입장이다. 삼성 고위관계자는 "문화 혁신은 아래로부터 의견을 수렴해 위로부터 개혁하는 것"이라며 "삼성은 강력한 수직적 문화를 갖고 있고,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위로부터 빠른 개혁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삼성은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에서 먼저 문화 혁신을 실시한 후 이를 모든 계열사로 확대할 예정이다.

삼성 안팎에서 종종 제기됐던 채용 제도 혁신 문제는 당분간 현재 방식을 유지할 예정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신입사원 공채 대신 경력 위주의 수시채용을 진행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이를 도입하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에서다.

삼성 관계자는 "모든 계열사가 동시에 공채를 진행하는 것은 채용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함"이라며 "채용 방식을 바꾸는 것은 예기치 않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어 부담이 크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