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나를 내려놓을 곳’을 찾아가자

새벽에 내린 비로 꽃길이 된 통점절길/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올해도 통점절길에 산벚꽃이 흐드러졌다. 산벚 뿐이랴. 개복숭아 나무도 철쭉도 땅 속에 뿌리를 내려 분홍빛, 붉은 빛 물감을 부지런히 길어 올린다. 시간을 타고 온 것들은 시간을 타고 떠나가는 법. 새벽에 내린 비에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빗물을 따라가다 멈춰 꽃길을 만들었다. 천상으로 가는 길이 저럴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자연이 그려놓은 완벽한 그림을 망칠까 조심조심 걷는다.

올해도 몇몇 가까운 이들과 통점절길을 찾았다. 몇 년째 함께 다니는 멤버들이다. 평소에는 혼자만의 여행을 선호하지만, 이 길만큼은 좋은 벗들과 함께 찾아오고는 한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아무 곳이나 주저앉아 폐부 깊숙이 산바람을 들이는, 지상에 와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 미안하기 때문이다.


통점절길은 충남 보령군 주산면에 있는 산길이다. 정확하게는 주산면 소재지에서 조금 떨어진 산 속의 임도(林道)다. 임도의 사전적 풀이는 ‘임업경영과 산림을 보호관리하기 위해 산림 내에 내놓은 차도’ 그러니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길인 셈이다. 사실 이 길은 동네 사람 말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동네 사람들 역시 산나물이 나는 계절에나 찾을까, 평소에는 사람의 기척을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 유행하는 ‘둘레길’이니 ‘자드락길’이니 하는 이름 하나 얻지 못했다. 내게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길이다.

몇 년 전 이 길을 처음 만났을 때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가까운 선배의 고향 방문 길에 동행하면서 알게 되었다. 통점절길이라는 이름도 내가 처음 지어 불렀다. 공식 이름은 용주사(龍珠寺)지만 동네 사람들이 흔히 통점절이라고 부르는 작은 사찰이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통점절 쪽에서 걷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올라간다. 같은 길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사람인들 안 그럴까. 농가들을 벗어나면서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저만치 빨갛고 파란 지붕의 집들이 그림 속 풍경처럼 안온하다. 들에서 봄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이 풍경을 완성시킨다. 조금 떨어져 앉은 산들은 파스텔 톤으로 성장(盛裝)하고 있다. 발을 들이기 미안할 정도다. 산이 가까워지면서 걸음은 한없이 느려진다. 참견할 것들이 널려있다.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 쑥, 노란 꽃 하얀 꽃을 보석처럼 피워낸 민들레, 보기만 해도 입맛이 도는 씀바귀, 주인이 떠난 빈 집 주변을 가득 채운 머위….

다랑논 옆에서도 꽃들이 피고 진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굽이굽이 구부러진 길은 앞장서 가다가 곧잘 꼬리만 남기고 모습을 감춘다. 사진을 찍느라 조금 뒤쳐져 있으면 일행도 감쪽같이 사라진다. 허겁지겁 따라가 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길과 사람이 어울려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 비 개인 오후, 말끔하게 머리 감은 햇살이 연초록 나뭇잎을 투과하면서 그려놓은 빛 그림이 황홀하다. 이곳의 색들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들이대지 않는다. 옅은 물감을 조금씩 내어 공동의 그림을 완성할 뿐이다.


꽃그늘 아래를 걷는 이들의 표정이 꽃처럼 환하다.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도 사랑방 화롯가에 앉은 듯 구수하다. 이곳에서는 원수를 마주쳐도 미워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구도 튀지 않는다. 산과 나무가 사람 속으로 들어오고 사람들이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종내는 하나가 된다. 그렇게 어울려 걷다보면 길의 끝머리쯤에서 통점절을 만난다. 절 역시 특별할 게 없다. 그래도 꼭 들러 가야한다. 시원한 석간수를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떠서 벌컥벌컥 들이키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속세에서 지고 올라온 근심의 찌꺼기까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한결 가벼워진 심신으로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어느 날은 만사 제쳐두고 도시를 떠나볼 일이다. 산과 들과 강과 나무와 풀, 그리고 구름과 바람의 넉넉한 품에 지친 나를 맡겨볼 일이다. 마음에 진 짐을 온전히 내려놓을 일이다. 자연은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안아주고 씻어준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나만의 장소’ 하나쯤 갖고 있으면 더욱 좋다. 열 번 스무 번 가도 질리지 않는, 마음 통하는 이들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그런 길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