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양적완화’ 논란, 한은은 곤혹스럽다

22일 오전 서울 소공동 한국은행에서 열린 시중 은행장들과 의 정례 금융협의회에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스1

“한국은행이 1998년 독자적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한 이후 가장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 같다”

최근 불거진 ‘한국판 양적완화(QE)’ 논란과 관련해 전직 한은 고위 인사는 “기준금리 조정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이런 말을 했다.

새누리당이 올해 4·13 총선 공약으로 제시한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논란이 점증되면서 중앙은행인 한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 한국판 양적완화 왜 논란이 되고 있나=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던 강봉균 전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은 지난 3월 29일 총선 공약으로 한은이 KDB산업은행이 발행한 산업금융채권, 주택금융공사가 발생한 주택저당증권(MBS)를 인수토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한은의 발권력을 이용해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해소에 자금(실탄)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한은이 산은채를 후순위채권으로 사들여 기업 구조조정 중심에 있는 산은의 자본력을 확충하고, MBS도 매입해서 5년 미만인 주택담보대출 만기를 20년 안팎으로 늘려 가계부담을 덜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원내 1당을 내주며 사실상 패배하자, 추진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잠시 수그러들었던 이 논의는 정부가 총선 이후 부실기업 구조조정 논의를 본격화하면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달 초 열린 구조조정협의체 회의에서 "앞으로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 손실분담 능력을 갖추기 위해 (산은·수은 자본확충)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며 "기재부와 한국은행에 자본확충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 때만 해도 ‘한국판 양적완화’란 표현은 잠잠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다시 이를 공론화 시킨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6일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 오찬간담회에서 “강봉균 위원장이 공약으로 제시한 한국판 양적완화 정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힌데 이어 28일 국무회의에서는 “구조조정을 집도하는 국책은행의 지원여력을 선제적으로 확충해 놓을 필요가 있다”며 이른바 ‘선별적 양적완화론’을 꺼내들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JW매리어트호텔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역대 부총리-장관 만찬 간담회에서 역대 부총리 및 장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스1<br>

◇ 찬반 양론 팽팽…기재부·한은 전직 수장 대리전까지 번져= 이 문제를 놓고 각계 전문가들은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안동현 자본시장연구원장(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은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재정·통화당국이 모두 고민해야 될 시점”이라며 “다만 국책은행 출자는 특정산업 지원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양적완화란 표현은 적절치 않고, 금리인하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부작용이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특정 부문에 중앙은행인 한은이 돈을 푸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 매우 신중을 기해야 될 문제”라며 “앞으로 가계부채 해결 등에서도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텐데 이런 이슈가 불거질때마다 한은 발권력을 남용하면 모럴헤저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직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수장들도 이 문제를 놓고 상당한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다. 관료 출신들은 한은의 역할론을 강조하고, 중앙은행 출신은 기본원칙을 중시하며 대립한다.

양적완화를 설계한 강봉균 전 장관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탄(자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며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한은이 수은, 산은 등 국책은행 자본력을 확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경환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재정만 갖고 기업 구조조정을 하는데 한계가 있어 전직 부총리로서 (한국판 양적완화를 위한) 법 개정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면서 “한은 독립성 때문에 진전을 못시켰다”고 했다.

반면 박승 전 한은 총재는 “중앙은행은 개별기업이나 산업의 문제에 개입해선 안 된다”며 “산업은행 출자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한은이 인수해서 정부가 하는 방식으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성태 전 한은 총재는 “한국판 양적완화는 특정 산업 지원을 위해 한은이 정책금융을 지원해달라는 얘기를 돌려 말한 것에 불과하고 중앙은행 기본원칙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산은법을 개정해 출자를 하겠다는 구상에 대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중앙은행 발권력을 이용해 해결하겠다는 의미와 다를께 없다”며 “중앙은행 근간을 흔드는 가장 안 좋은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 與野 대립도 팽팽…한은 신중론 속 반대입장=정치권도 구조조정 재원 마련 해법을 놓고 시각차가 상당하다. 여권은 한국판 양적완화를, 야권은 한은 발권력보다는 추경을 주장한다.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29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한국은행에서 돈을 찍어내는건 당장 정부재정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여 정부 성적표는 좋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전국민에게 골고루 부담을 지우는 일”이라며 “다른 모든 수단을 제쳐두고 양적완화 카드를 꺼낸 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신중한 입장 속에 반대기류가 강하다.이주열 한은 총재는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신용경색 등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다양한 정책수단을 통해서 적극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법 테두리 내에서, 중앙은행의 기본원칙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윤면식 한은 통화정책 담당 부총재보도 “기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국책은행 자본확충이 필요하다면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앙은행 발권력을 동원해 재정의 역할을 하려면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했다.

한은 노조는 “부실이 된 조선사는 국책은행이 대주주로 10년을 넘게 경영했기 때문에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라며 “국가채무 증가에 따른 비난을 피하기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려는 것은 지극히 전근대적인 발상이자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