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달마산이 품은 두 절, 미황사와 도솔암

미황사 올라가는 길/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난히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있기 마련이다. 나처럼 일삼아 이곳저곳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 여행지는 뼈에 각인이라도 된 듯,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다.


내게는 안동의 병산서원과 해남의 미황사(美黃寺)가 그런 곳이다. 특히 미황사는 여행 관련 글을 쓸 때 여러 번 언급했을 정도로 가슴 깊이 들어앉아 있다. 한반도에 터를 잡은 사찰 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절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처음 미황사를 찾은 것은 2000년대 초반쯤이었다. 벌써 15년 가까이 된 셈이다. 절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무척 고졸(古拙)한 절이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웅보전과 응진전, 요사채 등 건물 몇 채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동백나무 숲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병풍처럼 둘러싼 달마산(達摩山)의 품속에 안온하게 자리 잡은 절집. 한 눈에 반하는 바람에, 왜 이제야 왔을까 후회할 정도였다.

미황사에 머무는 내내 내가 한 일이라고는 툇마루에 앉아 비를 그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냥 행복했다. 마치 잘 그린 그림 속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조금 더 멀리 물러서 있는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란 이름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내게는 급할 일도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한나절쯤 그렇게 앉아서 빗속의 절집과 산에 시선을 맡겼다.

그 뒤로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그곳에 가볼 기회가 없었다. 절실하게 그리운 사람은 더 만나기 어렵다고 했던가. 그러다가 작심하고 찾아간 게 지난 3월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황사는 그동안 그리워하던 그 절이 아니었다. 전에 없던 일주문부터 생경했다. 곳곳이 바뀌어 있었다. 그동안 여기 저기 다니면서 만났던 ‘큰 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순박한 첫사랑 소녀를 그리다가 한껏 성장(盛裝)한 미부(美婦)를 만난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미황사로 보면 오랜 숙원을 이룬 중창불사였겠지만, 추억 하나에 기대어 찾아간 내게는 낯설 뿐이었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오래 앉아 비를 바라보았던 툇마루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였던가? 저기였던가? 아무리 기웃거려도 어디에 앉아 있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다른 절과 착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존재하지도 않았던 툇마루를 그리워했던 것이라고 마음을 달래며 돌아서고 말았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로 채워 지은 도솔암/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다행히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달마산은 내가 미황사에 낙담할 줄 알기라도 했다는 듯, 다른 선물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별 기대 없이 찾은 도솔암에서 뜻밖의 기쁨을 맛보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능선을 따라가는 0.7km의 산길부터 범상치 않았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던 달마산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병풍 속으로 직접 들어가 걷는 것 같다고나 할까. 뾰족하고 날카롭고 깎아지른 듯한 온갖 바위들 사이를 걸어가는 기분이라니…. 저 아래로 땅끝 일대와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그리 좋지 않은 날이었는데도, 눈이 시원해지고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렸다.

그 능선 길 끝에 도솔암이 있었다. 이 땅에 저런 절도 있었구나.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깎아지른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로 메워 조성한 터에 들어선 작은 절 하나. 그 소박하면서도 신비로운 모습이라니. 어찌 보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신라의 의상대사는 무슨 뜻을 품고 이 험한 곳에 절을 지었을까.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산자락 끝에서 치마폭을 펼친 들판은 사람 사는 마을을 품고 달려가다 바다 앞에 멈춰서있었다. 해남 8경 중 으뜸이라더니, 괜한 이름이 아니었구나. 속진에 찌든 몸으로 오래 서 있기가 미안했다. 이곳이야말로 청정한 부처의 영토가 아니던가.

내려오는 길, 마음은 평온하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미황사에서 가졌던 아쉬움도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이만 하면 됐다. 미황사는 미황사대로 좋은 기억으로 남겨두고 도솔암의 감동을 가슴에 담아가면 됐지. 따지고 보면 시선과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지금의 미황사가 가장 아름다운 절일 것이다.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을 그런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