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동식물적 상상력으로 인간의 존재이유를 묻다

이병일 시인(2007년 문학수첩 신인상 수상)의 두 번째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은 온갖 동식물이 서식하는 숲 속 같다. 도시와 가까운 숲 속에 뛰어든 시인은 가까이에서 그들을 관찰하며 세밀하게 기록한다. 그들의 삶은 천생 이야기꾼인 시인에 의해 한 편 한 편 반짝이는 시로 다시 태어난다.


인간과 더불어 행복해야 할 동식물들은 인간에 의해 불행해진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연은 파괴되고, 동식물은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시인은 ‘나의 에덴’이라는 부활의 땅을 마련한다. “아무도 닿은 적이 없어 늘 발가벗고 있는 깊은 산” 속 ‘에덴’은 “미친 것들 푸르러지고, 죽은 것들 되살아나는” 생명의 땅이다.

절벽에 부딪혀 죽은 갈까마귀들, 우리 안에서 차츰 죽어가는 투견, 끈끈이에 걸린 쥐, 구제역에서 걸려 산 채로 매당 당하는 돼지들, 육중한 굴착기로 파헤쳐진 하천에서 숨이 끊어지는 가물치들, 63빌딩 수족관에 갇힌 펭귄들, 멸종위기에 처한 산양 등 생명이 스러져 가는 동물들은 ‘나의 에덴’에서 ‘도깨비불’의 힘을 빌려 회생한다. 시인은 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기린의 목엔 광채 나는 목소리가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감아올릴 수가 있지 강한 것은 너무 쉽게 부러지므로 따뜻한 피와 살이 필요하지

기린의 목은 뿔 달린 머리통을 높은 데로만 길어 올리는 사다리야 그리하여 공중에 떠 있는 것들을 쉽게 잡아챌 수도 있지만

사실 기린의 목은 공중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중이야 쓸데없는 곡선의 힘으로 뭉쳐진 기린의 목은 일찍이 빛났던 뿔로 새벽을 긁는 거야

그때 태연한 나무들의 잎눈은 새벽의 신성한 상처와 피를 응시하지

아주 깊게 눈을 감으면 아프리카 고원이, 실눈을 뜨면 멀리서 덫과 올가미의 하루가 속삭이지

저만치 무릎의 그림자를 꿇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기린의 목과 목울대 속으로 타들어가는 갈증의 숨을 주시할 때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유연하고 믿음직스럽게 아름답지 힘줄 캄캄한 모가지 꺾는 법을 모르고 있으니까

-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전문


자연에 동화된 시인은 연금술사처럼 언어를 주무른다. 그의 손을 거친 언어는 금방 생기를 얻어 파릇파릇 이파리를 틔운다. 메말랐던 숲은 어느새 새들과 풀벌레가 춤추고 노래하는 건강한 숲으로 변모한다.

수주문학상 수상작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는 기린에 대한 묘사를 통해 언어 연금술사로서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광채 나는 목소리가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감아올릴 수가 있”다는 기린의 목은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한 가지 기능만 발달한, 높은 곳만을 지향하는 ‘사다리’ 같은 존재, 강한 척하지만 ‘피와 살’, 즉 혈연이나 학연 같은 인맥이 없으면 “너무 쉽게 부러지”고야 마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현대인인 것이다.

시인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적용되는 아프리카 고원이나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현실이 다르지 않음을 “아주 깊게 눈을 감으면 아프리카 고원이, 실눈을 뜨면 멀리서 덫과 올가미의 하루가 속삭”인다는 빛나는 문장으로 드러낸다.

동물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는 이병일의 시는 미학적으로도 완결성이 뛰어나다. 언어와 사유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확산된다. 수직과 수평, 직선과 곡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시의 외연을 넓힌다. 시인의 언어는 벌집을 쑤시고 도망가는 것처럼 활달하고, 사유는 깊은 산속을 홀로 걷는 것처럼 진중하다.

어느 한 편도 허투루 읽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조밀한 이 시집은 “두고두고 자랑할 일이 없을까 해서 자식을 아홉이나”(‘작은 신앙’) 낳은 시인의 어머니에게 바쳐졌다.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시인은 “흙을 만지고 사는 사람은 낮은 곳을 보고 살아야 한다”(시인의 말)는 어머니의 말씀을 빚어 진흙처럼 빛나는 시를 쓰고 있다. 어머니의 팔순 선물로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이병일/ 창비/ 156쪽/ 8000원